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고들빼기는 왕고들빼기, 가는잎 고들빼기, 이고들빼기 등이 있는데, 흔한 들풀이지만 쓴나물이라고도 하고 황화채(黃花菜)라고도 한다.정조 20년(1796) 2월 11일 자 외정리소(外整理所)의 절목에 고들빼기가 고돌박(古乭朴)으로 나온다. - -15세기 말 에는 뱀에 물린 상처에 ‘싀화’의 줄기와 잎을 짓이겨 붙이라는 설명이 있다. 여기에서 ‘싀화’는 ‘고거(苦苣)’라는 한자 명칭에 대한 한글 번역이다. 16세기 초 에서는 ‘고거’를 ‘샤라부루(蕒)’, 즉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히말라야산맥에 있는 부탄은 인구가 75만명밖에 안 된다. 우리나라 고양특례시 인구도 안 되는 작은 나라다. 그런데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평을 얻고 있다.한국의 한 여행자가 부탄을 다녀온 후 쓴 기행문을 보면 이들의 행복지수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려준다. ‘부탄 사람들은 삶에 지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생의 주도권을 갖고 살아가는 듯 보인다. 여행자가 갑자기 사진기를 들이대도 웃음으로 대한다. 금전적 가치가 그들의 행복의 조건이 아닌 듯하다’부탄에는 국가행복연구소라는 기관이 있다. 이곳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1950~1960년대를 살아온 필자는 요즘도 쌀이 조금 섞인 보리밥에 노란 황금빛 고구마가 들어간 어릴 적 ‘고구마밥’이 생각난다.보릿고개 꽁보리밥조차 먹기 힘들었던 시절 다행히 어머님이 하숙집을 운영하셨던 탓에 밥사발에 그나마 하얀 쌀이 섞였던 것 같다.아버지는 토광에 고구마를 쌓아 놓으시고 매일 가마솥에 사발을 엎어 놓고 고구마를 넣고 물을 조금 부은 후에 할머니 방 아랫목이 따스해질 때까지 군불을 때신다.이렇게 익은 고구마는 하숙생은 물론 우리 가족들의 겨울 밤참이었다.고구마와 부엌 헛간에 묻어둔 항아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무는 명대(明代)의 뛰어난 의약학자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昔人以蕪菁(석인이무청), 萊挘二物混注(내열이물혼주)라고 나오는데, 옛사람들이 무청(蕪菁)과 내열(萊挘)을 혼동해 쓴 것으로 보아 무청을 줄여서 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옛말로 ‘무수’ ‘무ᅀᅮ’였는데, 이것이 무우로 변했고, 그 준말로 무가 표준어가 됐다. 한문으로는 나복(蘿蔔), 내복(萊挘), 蘆蔔(노복) 등이며, 무의 씨는 나복자(蘿蔔子)라고 한다. 나박김치의 나박은 나복에서 온 말이다. 순무는 만청(蔓菁
서은훤 행복플러스연구소 소장다산 정약용은 정조 임금에게 큰 사랑을 받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돼 강진으로 유배됐다. 그곳에서 유배자의 시름을 잊기 위해서 시골 아전의 자식들을 가르치기로 한다. 투박하지만 배움을 갈망하는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는 어렵게 질문을 한다.“선생님, 그런데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꽉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을까요?”그 질문에 대한 다산의 답은 다음과 같다.“공부는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구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고부터 뇌물이 생겼다. 부정한 관리는 뇌물을 받아야 일을 처리해주고 치부의 수단으로 삼았다. 기원전 고대 이집트 시대 때부터 이미 뇌물은 사회의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이집트 왕조는 뇌물을 ‘공정한 재판을 왜곡하는 선물’로 규정하고 행위를 단속했다는 기록이 있다.고대 중국에서는 뇌물을 ‘동취(銅臭)’라고 했다. 이는 꽤 유명한 말로 엽전을 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취에 대한 고사는 후한서 ‘최열전’이다.중국 후한 시대 말기 환관들이 권세를 잡고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국고가 바닥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보리 고개’를 한자어로는 ‘맥령(麥嶺)’이라고 했다. 가난했던 시절 초여름 식량사정이 가장 어려웠을 때를 지칭한 말이다. 필자와 비슷한 나이를 지닌 세대들은 혹독한 보리 고개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게다.사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초근목피로 연명해 얼굴이 붓는 부황(浮黃)에 걸린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노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로는 일제 강점기 보리 고개에는 산에서 소나무껍질을 벗겨 지게에 지고 와 끓여 먹었다고 한다.세종 때 만들어진 ‘구황벽곡방(救荒辟糓方)’은 솔잎을 이용한 기아 대처방안이었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백성은 토지를 논밭으로 삼지만, 아전들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아전을 이렇게 혹평했다.그런데 청렴한 아전으로 이름을 남긴 이도 있다. 영조 때 호조서리(戶曹胥吏) 김수팽이 그렇다. 그는 기개가 뛰어나고 대장부다운 절조가 있었다.하루는 김수팽이 선혜청 서리인 동생 집에 들렀다. 그런데 마당에 항아리들이 줄지었고 검푸른 염료가 여기저기 묻어있었다.“이게 무엇인가?”김수팽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동생에게 물었다.“아내가 염색업(染色業)을 하고 있습니다.”아우는 공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강진군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을 걷는다. 이 길은 유학과 불교의 만남, 정약용(1762∼1836)과 혜장 선사(1772∼1811)가 걸었던 길이다.1800년 6월에 정조가 갑자기 붕어했다.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에 연루돼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으로 유배 왔다. 그런데 그에게 거처를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맙게도 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토담집 방 한 칸을 내주었다. 1802년 초봄부터 정약용은 아전 자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는데 ‘사의재’라 했다.1805년 봄, 바깥
박희제 인천언론인클럽 회장 산자락과 길가를 지날 때 아카시아와 라일락 향기가 솔솔 피어난다. 20대 대학 캠퍼스에서 맡았던 청춘의 냄새다. 이번 지방의원과 기초자치단체장 후보로 MZ세대 진출이 눈에 띌 만큼 많아져 세대교체 바람이 조용히 불고 있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이, 새사람이 옛사람을 대신한다’는 게 세상 이치 같다. 그렇지만 몸집이 큰 행정수장인 시장과 도지사는 구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서울시장의 경우 유력 후보들이 취약계층 보호를 위한 4대 정책이나 유엔본부 유치 등을 통한 국제도시 도약을 제1호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도지사격인 조선시대 감사(監司)를 순상(巡相)이라고도 불렀다. 백성들은 높은 집인 합(閤)에 상주한다고 해 합하(閤下)라는 호칭을 썼다. 백성들이 민원을 감사에게 올릴 때는 글 서두에 ‘순상 합하’라고 하며 온갖 미사여구로 칭송하는 것이 상례였다.감사는 정2품의 품계를 지닌 대신 가운데서 선발해 파견됐다. 임금을 대신해 한 도(道)의 사법, 행정을 처결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많은 감사 가운데 훌륭한 인물도 있었지만 본연의 일보다는 주색잡기나 탐관이 돼 나중에 파직되는 경우도 많았다.조선 세종
천지일보가 독자참여코너로 가로세로 낱말 퀴즈를 연재합니다. 낱말 퀴즈는 가로세로 낱말퍼즐 저자로 잘 알려진 김수웅 선생이 직접 출제한 퀴즈가 격주로 게재됩니다. 퀴즈에 응모하는 독자 중 5분을 추첨해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증정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가로열쇠1. 아름다운 여인은 목숨이 짧다. 미인은 일찍 죽는다는 뜻3. 결심이 얼마 되지 않아 흐지부지 된다는 말6. 결혼한 한 쌍의 남녀. □□싸움은 칼로 물베기8. 물이나 술 따위를 데우거나 담아서 따르게 만든 그릇10. 사람의 손으로 길들인 매나 새매. □□□ 날지니 해동청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옛날 관아에 있던 서리를 ‘아전(衙前)’이라고 불렀다. 육조를 모방해 육방(六房)을 뒀으니 이들이 최말단 공직으로 대 주민 공무를 담당했던 셈이다. 아전은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아니면서 백성들에게 ‘나으리’라고 불렸다. 아전도 권력이라 ‘기생이 아전서방을 두면 팔자를 고친다’는 속담도 전해 내려온다.가을철 환곡을 징수하면서 가혹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던 아전들이 백성들에겐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으리라. 세 징수를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부뚜막에 걸린 쇠솥 단지까지 압수해 간 아전들의 잔인한 행위에 민초들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조선시대에도 죄가 없는데 귀양을 가거나 옥에 갇힌 사람들이 많았다. 정절을 지키며 오로지 낭군만을 기다리던 고전 속의 춘향은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는다. 죄목은 관장(官長) 능멸죄. 남원부사 변학도가 수청거절에 대한 앙심으로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권력자들이 힘없는 백성이라고 제멋대로 인신을 구속하고 체벌을 가했던 봉건의 악폐를 알려 준다. 비록 픽션이지만 권력자들에게 당하는 민초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읽을 수 있다.조선을 개국한 정도전은 젊은 시절 원나라 사신 마중을 거부했다고 10년간 나주에서 귀양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남의 주장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을 마이동풍’이라고 한다. 요즈음 문재인 정권에 대한 풍자 언어로 등장했다. 위정자들이 가장 중요시해야 할 사안이 민의(民意)인데 이런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나라의 앞날이 어둡기만 하다.이 말이 유명해진 것은 당나라 시인 이백이 작품 안에 이를 인용하고부터라고 한다. 당 현종 때 무신 실세들이 작은 공을 세운 후에 황제에게 총애를 받으면서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문인들이 멋진 시를 지어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백이 저자거리에서 매일 술에 떡이 돼 귀가한 것도 이런 소외감 때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오등은 오늘 만천하에 눈물로 호소하노라. 고래로 우리 백성들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느뇨? 무엇보다도 배가 고프지 않아야 하며, 공정한 가치가 확립돼야 하며, 아무나 죄를 만들어 백성들을 구금하지 않는 국가였도다.그러나 지금 우리 백성들은 눈물과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직장이 없어 배가 고픈 젊은이들, 극단적 실직가장들의 참극을 모두 보았지 않았는가. 호황이었던 상가들은 모두 철시하고 집세를 내지 못해 방치하고 있는 곳이 무릇 기하이뇨. 분노와 좌절로 희망을 접고 있는 백성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한 청년이 마트에 들어가 흉기로 판매원을 협박하고 경찰을 불러 달라고 했다. 경찰이 잡고 보니 직장이 없어 생계마저 어려워 교도소에 가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청년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런 방식으로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는 시대가 됐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젊은이들이 주변에는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마트에서 젖먹이에게 줄 우유를 훔치다 체포된 30대 가장, TV에서 아침부터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인력시장에 나갔다가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리는 40대 가장의 축 처진 어깨를 잊을 수가 없다. 왜 세계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난계 박연(蘭溪 朴堧)은 세종 당시 아악(雅樂)을 정리한 분이다. 76세 되는 해 계유정난으로 아들이 사형 될 때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세조는 나이가 많고 3조에 걸친 공신이라고 감옥에 가두지 않았다.난계의 고향은 충북영동 심천이었다. 그가 낙향하면서 청주목에서 하루 묵게 된다. 해가 기울자 난계는 피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처연하게 곡조를 탔다. 아들의 죽음과 어린 단종에 대한 아픔 때문이었을까. 구슬픈 피리소리에 몰려든 관아의 관리나 기생들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조선 유교사회에서는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유전무죄 무전유죄’. 한동안 많이 유행되던 말이다. 지금 세태에는 어떤 말이 유행할 수 있을까. 권력에 줄을 잘 서거나 당을 잘 택하면 죄를 지어도 살아남을 수 있어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 無權有罪)’라는 유행어가 생길만 한 세상이다.이미 공정의 가치가 무너져 내린 한국사회, 마지막 양심의 보루인 사법부마저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결정이 속출하고 있다. 현 집권세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 범죄혐의자들의 구속영장이 기각되거나 재판을 받고 있는 이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있다.유재수 전 부산시 부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코로나로 자발적 유배 1개월째다. 다산 정약용의 ‘원목’과 ‘원정’을 읽었다. 원목은 ‘목(牧)이란 무엇인가?’를 캐묻는 글이다.“목민자(牧民者)가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자를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쌀을 생산하여 목민자를 섬기고, 고혈을 짜내어 목민자를 살찌우고 있으니 백성이 목민자를 위하여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자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목민자인 이정, 당정, 주장(州長), 제후, 왕은 모두 추대된 자들이다. 그런데 후세에 어떤 이가 스스로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