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조선은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전쟁을 하자는 척화파(斥和派)가 첨예하게 대립하니 새로운 차원의 당쟁에 돌입하게 되었다.그러나 결국 인조(仁祖)가 척화파(斥和派)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상황이 돌변해 청태종(淸太宗)이 1636(인조 14)년 12월 2일 직접 군사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신호탄(信號彈)이 시작되었다.한편 청나라의 이런 기습적인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198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충북도문화재위원이었을 때 청주시 북이면에 있는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 1586~1647) 후손들이 묘소를 도문화재로 지정해달라는 민원이 있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으로 척화론에 맞서 화의를 주장한 인물이다.인조가 피난한 남한산성 행궁에서 한편은 화의를 해야 한다고 하고 한편은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있었다. 항복문서를 작성한 최명길, 이를 어전에서 찢은 김상헌의 눈물겨운 얘기는 영화 남한산성에서 리얼하게 재현되기도 했다.최명길의 묘소는 당대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조선군의 저항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홍타이지 자신이 조선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금적금왕(擒敵金王)이었다. 왕만 잡으면 전쟁은 끝이라는 생각에는 그를 따라 참전한 강홍립의 조언도 기여했을 것이다. 병자호란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남한산성의 포위와 광교산의 일전, 강화도에서의 소규모 전투를 제외하고 이렇다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홍타이지의 금적금왕계가 주효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전국적 규모의 의병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기 4개월 전인 1636(인조 14)년 8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조정(朝廷)은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로 대립됐다. 석호(石湖)의 부친 윤황(尹煌)은 척화의 주창자(主唱者)였으며 그 또한 척화를 주장하는 계차(啓箚)를 올렸다가 체직(遞職)되었다. 그 이후 10월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어서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나 결국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해 윤문거는 병자호란 때 부친을 따라 어가(御駕)를 호종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가 31세가 되는 1636(인조 14)년에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광해군(光海君)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1623(인조 1)년 폐위된 이후 불과 4년 만에 전쟁이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다. 이와 관련해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는 후금(後金)이라는 국가명(國家名)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본래 후금은 건주 여진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누르하치가 1616(광해 8)년 이러한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세운 나라가 바로 후금이었다. 이러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인조(仁祖)의 이러한 교서(敎書)가 귀국길에 오른 청 사신의 조선인(朝鮮人) 통역관(通譯官)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사건이 확대일로(擴大一路)의 양상(樣相)을 띠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통역관을 통하여 이 교서를 전달받은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는 귀국한 이후 이러한 상황을 청태종(淸太宗)에게 보고했다. 이와 관련해 인조의 교서를 읽은 청태종은 “이제 전쟁은 불가피하다. 전쟁을 할 바에야 조선이 대응을 하기 전에 신속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 속도전(速度戰)을 결행(決行)했다. 청태종이 마침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지난 봄 국립청주박물관이 매우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한바 있는데 바로 문제가 된 영화에 대한 토론이었다. 병자호란 중 이념 대립을 그린 ‘남한산성’,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폐주 광해군을 재조명하는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여러 편의 영화가 대상이었다.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이 광해를 소재로 한 영화였다. 줄거리는 광대가 광해가 됐다는 것을 가정으로 얘기를 만든 것이다. 사실 역사기록과는 거리가 먼 영화였지만 천만관객을 동원했다. 왜 관객들은 이 영화에 이토록 열광한 것일까.왕의 옷을 입은 광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난세에 또 다른 축의 최명길(주화파)과 달리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청과 항전할 것을 굽히지 않았던 주전파의 대부 김상헌이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읊은 시조다.시대는 달라도 선조와 광해 그리고 인조의 정치외교사를 통해 오늘날 처해 있는 현실을 조명해 볼 수도 있다. 사색당파 즉, 동인과 서인, 남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던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치욕을 겪어야 했고, 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많은 성곽(城廓)을 새로 쌓거나 수축했다. 이런 국가적 공역이 7세기 후반 문무왕(文武王) 시기에 이뤄진다. 왜 전쟁이 사라진 시기에 성을 더욱 튼튼히 한 것일까.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도 이 시기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뤄졌다. 남한강에서 조령으로 통하는 충주 남산성의 축성도 삼국통일 직후 이뤄졌다. 남산성은 중원경 주민들의 보민성으로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 신라 성들은 백제 성곽들에 비해 특별히 견고했다. 백제 땅 예산 임존성이나 연산 황산성, 서천 건지산성 등은 견고하지만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백제는 아니러니 하게도 국력이 제일 커지는 시기 멸망했다. 왕도를 소부리로 옮기며 국호를 남부여라고 고친 1백년은 그야말로 도약의 단계였다. 그러나 안보의지는 매우 열악했으며 부여는 대군을 막아낼 험난한 요새가 없었다. 설마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왕도를 침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구려는 수나라 1백만 대군을 격파했다는 자부심으로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내부결속이 완화되어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노련한 전술가였던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이 권력 투쟁을 하다 나라를 잃었다. 임진전쟁은
1592년 왜(倭)는 대륙으로 나아가는 데 길을 내라며 조선을 침략하니 7년 전쟁 임진왜란이다. 이순신 장군은 ‘생즉사 사즉생’의 정신으로 싸웠고, 한편으론 명나라의 도움으로 왜적을 몰아낼 수 있었다.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혼란을 틈타 북방 여진족은 힘을 키웠고, 드디어 후금을 세워 명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위험에 처한 명은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당시 임진왜란을 경험한 광해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대북파와 함께 명과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중립 외교)로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며 실리를 쫓았다. 오늘날 사학자들이 광해를
장순휘 청운대교수, 정치학박사, 문화안보연구원 이사 영화 ‘남한산성’은 시대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영화의 장르는 역사물로서 소재는 병자호란(1636.12.28~1637.2.24)으로 조선과 청(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청의 홍타이지가 명(明)을 정벌하기 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했고, 인조의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으나 청군의 포위전술에 무조건 항복을 한 치욕의 패전이었다.이 전쟁은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전형적인 불법침략전쟁으로 우리의 입장에서는 오랑캐인 청에 대해 척화하는 것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35년 전인 1982년 9월 어느날이었다. 남한산성 밑 거여동 높은 구릉지에 자리 잡은 부대에선 밤이 되면 멀리 잠실야구장의 휘황찬란한 조명불이 보였다. 지금과 같이 하늘을 찌르는 고층빌딩과 아파트숲이 생기기 전이라 맑은 날 밤에는 잠실야구장 너머 남산 타워에서 반짝이는 불빛까지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잠실야구장에선 OB 투수 박철순이 괴력의 22연승 대기록을 한창 세우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그해 학군 장교(ROTC)로 임관, 소위로 근무하던 필자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대학 동기로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이전투구’라는 사자평설(四字評說)은 함경도인의 기질을 지칭한 것이다. 개국공신 정도전이 태조 앞에서 팔도를 평한 것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있다. 사람들의 성정이 각박하여 이익이 있으면 서로 개처럼 물어뜯는 형상에 비유한 것이다.함경도 땅은 본래 야인(野人, 여진)이 살던 곳으로 고려는 야만이라 하여 비하하던 지역이다. 고려 후기에는 야인 부족장들이 송도를 찾아와 대대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겨왔기 때문에 받아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이들이 난폭하며 예를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 배척했다.우리 역
최덕곤 전 하남부시장 현재 우리가 대가 없이 누리고 있는 자유, 민주, 평화는 선조의 피땀으로 점철된 과거에 기인하고 있다.그러나 역사에 대한 방관과 무관심 그리고 배우기를 꺼려하는 탓에 과거의 시간과 현재가 자꾸만 단절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제대로 된 역사를 알지 못하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능력도 점차 퇴화되는 모습이다. 젊은이들이 픽션을 자꾸만 논픽션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역사 단절’이 낳은 병폐현상 중 하나다.더욱 심각한 것은 진정한 반성도 책임규명도 하지 못하는 그런 과오 메카니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체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