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3월 14일, 이날은 해가 360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오는 대 갑자년으로 우주의 일주 해를 맞는 날이다. 따라서 세상은 알지 못해도 서기(西紀) 시대가 끝이 나고 신천기(新天紀) 시대가 도래했다.이는 예고 없이 온 게 아니며, 오랜 세월 성인들의 입과 글을 통해 전해왔고, 모든 경서가 이 한 가지를 알려왔다.그래도 이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이유는 오직 자기 생각에만 골몰하고 염색돼서 자기의 꾀만 의지해왔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해서 올 것이 안 오는 것도 아니며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는 진리를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외교부 공식인가 사단법인 세계경제문화교류협의회(ECI, 류영준 총재)는 일본 내 이방자 여사 관련 왕실인 이본궁기념재단, 덴리대학과 지난해 12월 27일 ECI갤러리에서 몽유도원도 국내 환수를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이본궁기념재단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의 황실가문으로 우리나라와는 인연이 깊다. 덴리대학(천리대학)은 몽유도원도 일체가 소장돼 있는 곳이다.ECI는 이본궁기념재단 중요문화재 증여에 관한 협정서(2022년 3월 14일)와 덴리대학 기부행위확약서(2021년 10월 20일)에 의해 지난 2022년 1
흥망성쇠(興亡盛衰). 약 500년 전 조선조 중기 유학자 격암 남사고 선생이 찾아 나선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경북 울진 불영계곡을 거닐며 사색에 잠기며 번민했다. 왜 이 세상에 흥망성쇠가 있어야 했는지에 대한 궁구심 때문이었다.그런데 남사고 선생의 궁구심은 오늘에 와서야 그 답을 찾게 됐다.흥망성쇠의 굴레 즉, 그 연속성은 이쯤에서 끝나는 것인가.흥망성쇠가 있다면 영원한 것이 있겠고, 영원한 것이 있기에 흥망성쇠가 있었을까.지금까지 흥하다가도 망하고 성하다가도 쇠하는 것이 반복돼야만 했던 지난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유가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 곧 ‘참 자유’를 말한다.자유 곧 참 자유는 거저 오는 게 아니라 이김으로 오는 것이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되찾는 것이다.우이독경(牛耳讀經)이 돼 버린 악한 세대에 누가 이 말을 알아듣겠는가. 그래도 들을 귀가 있는 자가 있을까 해 오늘도 힘을 내 써 내려간다.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무엇인가.작금의 시대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 하듯, 형이하학적 차원을 넘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매사를 진단하고 분석하고 현실을 직시해 살아가야만
지구촌은 아비규환 그 자체다. 인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걸까.아비규환은 인류가 당연히 걸어야 하는 업보(業報)이던가. 모든 것이 궁금하고 의문투성이가 아닌가.그 옛날 석가세존은 피조물의 생로병사가 도대체 어찜인지 조물주를 찾아 나섰고, 유학자 격암 남사고는 유년시절 고향 울진 불영계곡을 거닐며 흥망성쇠는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한 궁구심으로 신을 찾았다.그런데 오늘날 요지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도무지 묻지를 않는다. 묻기는커녕 습관과
이 세상이 존재하고 유지하고 발전해 나가기 위해 절대 필요한 게 있다면 각자의 역할이다. 인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 중 한 가지가 있으니 기자(記者, reporter)라는 직업군이다.기자의 역할은 독자(시청자, 국민)들에게 사회와 나라 나아가 세계에서 일어나는 정보(뉴스)를 편견과 가감 없이 신속 정확하게 알려야 하는 아주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이제 생각해 볼 것은 일반적 기자의 사명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지만,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의 기자도 있음을 알리는 바다.우리는 흔히 형
우리의 자아(自我)는 무의식 가운데서도 늘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 ‘누구’는 과연 누구일까.어쩌면 인생은 그 누구를 막연하게 ‘님’이라 여기며 기다려왔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늘 사모하며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그렇다면 그 그리움의 대상인 님의 실체는 누굴까. 그 님의 실체는 생명이며 나아가 생명을 주는 그분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 말이다.사망 권세 아래 있는 이 세상에서 아니 생로병사의 굴레 속에서 영원히 함께하는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으며
홍익인간(弘益人間), 이 홍익인간은 우리민족의 건국이념이다. 먼저 이념이란 정치적 또는 종교적으로 협의 또는 광의로 그 의미를 제각각 정의하고 있으니, 한마디로 단정적 답을 내리기는 곤란해 보인다.그런 가운데서 필자 또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려 보고자 한다.먼저 이념(理念)이란 직역해 보면 ‘우리의 생각을 다스린다’는 뜻이며, 생각을 다스릴 수 있다는 데서 정치적 접근이 아닌 종교적 접근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는 답을 조심스럽게 얻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생각을 다스릴 수 있는 주체는 영(靈)이기 때문이다.사전적으로나 종교의 경서
삼월, 이제 삼월도 몇 날이 남지 않았다. 삼월이 다 가기 전에 못다 한 노래가 있어 또다시 펜을 들었다. 우리 민족은 삼월 하면 왠지 습관처럼 그날이 생각난다.그날은 104년 전 파고다공원에서 시작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병천 아우네 장터를 지나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고, 태극기 물결은 온 나라를 휘감던 바로 그때다.3.1독립운동, 이 3.1독립운동은 3.1정신에서 기인됐고, 그 정신은 진리(道義)와 자유와 자주와 독립과 평화와 인류 사랑이었다.이러한 3.1정신은 구한말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대적 상황에서 종교지도자 33인
길, 이 길은 도(道)라고도 한다. 온 세상은 온통 길이며, 모든 게 길로 연결돼 있다. 길은 왜 있는 걸까. 길이 존재하는 이유는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반대로 목적(지)이 없다면 길이 필요 없고, 목적지가 있어도 길이 없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없다.이것이 만고의 이치며, 따라서 길과 목적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필요충분조건과 같다.그렇다면 범사엔 목적이 있다 했으니, 우리 인생은 도대체 어떤 목적이 있을까.인생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봄직도 한데, 진정 생각해 봤는가. 이 목적은 어느 개인이나 특정 계층에 한정된 게 아
캠퍼스에서 독일의 대학교수와 갓 입학한 학생과의 대화 내용이다. 교수는 학생에게 대학입학 동기와 졸업 후 등 학생의 남은 인생 설계에 관한 질문을 순서대로 해 나갔다. 학생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입학 후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함이고, 좋은 직장에서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진급을 하고, 좋은 집을 짓고 가족과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다는 얘기다. 아니 얘기를 넘어 이 학생의 야무진 인생설계다. 여기서 이 학생의 야무진 인생설계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 설계는 인생설계가 아닌 죽음을 향한 계획이
찾아온 이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일까.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지금까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시대를 살아왔으나, 이젠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아 살아가는 시대라 한다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왜일까.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줄로만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며, 그러한 사고방식이 관성적 작용에 의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새 것을 싫어하고 묵은 것을 좋게 여기는 아주 잘못된 유전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쯤에 와서는
종교는 약속(예언)이 있어야 하며, 그 약속 또한 성취된 게 있어야 한다. 종교생활은 곧 신앙생활이며, 신앙(信仰)의 뜻은 뭔가 자기가 믿는 것이 정한 때가 되어 이뤄져 나타날 것을 바라보며 기다린다는 의미다. 만일 신(神)께서 약속하신 게 없다면 신앙인이 이를 기다릴 이유가 없고 소망도 믿음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것이 되고 만다. 신앙인이 바라고 기다리는 희망과 소망이 자신의 종교의 예언(약속) 안에 있기 때문에 이를 지키고 기다리며 믿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종교생활 내지 신앙생활이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
기다림의 대명사 하면 누가 떠오를까. 바로 강태공이다. 그는 기원전(BC) 약 1200년 전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문왕에 의해 발탁되어 그의 아들인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주나라 건국에 크게 기여한 실존 인물이다. 강태공 하면 위수 강변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채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기다린 일화로 유명하다. 그래서 기다림의 대명사 곧 강태공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유다. 그때 그의 나이는 70세가 넘었다. 이후 강태공은 오늘날의 산둥성 지역을 봉지(封地, 천자가 봉하여 준 제후의 영토)로 받고
만물은 스스로 난 것이 없다. 삼라만상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들이다. 그런데 조선 중기 유학자 격암 남사고 선생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만물들이 무엇인가를 고대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기다리는 대상은 ‘신천지 세상’이 오는 것이라 한다. ‘송구영신 호시절 만물고대 신천운(萬物苦待 新天運)’이라 했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에 대해 세상은 설왕설래(說往說來) 할 것이고, 나아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하며 잘난 체를 할 것이나 그 체하는 자체로 인해 만물은 새 세상을 고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지구촌을 살아가는 지상만민들은 꼭 한 가지 확인해야 할 때가 왔다. 이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창조한 만물을 다스려 오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확인해도 되고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법이요, 명령이다. 더욱이 그래야 하는 이유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며, 삶과 죽음보다 더 크고 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운행돼 온 인류는 지금 바로 그 기로에 서 있으며, 그 옛날 옛적부터 ‘천지분간’ 할 때가 있음을 알려온 이유이기도 하다. 천
누구를 막론하고 삶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 한번쯤은 생각해 보는 게 있다.현실과 현세가 아닌 또 다른 이상의 세계(이상향, 유토피아, 낙원)를 꿈꿔 본 적이 있을 게다. 이 이상향을 다르게는 ‘무릉도원’이라 불러왔다.삼천리 금수강산 아니 지구촌 그 어디를 가든 마치 선계(仙界)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곳이면 의례히 ‘무릉도원’이라는 지명이 붙어있다.그 유례를 살펴보면, 무릉도원은 중국 도연명(陶淵明, 시인)의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시(時)에 나오는 가상의 선경(仙境)으로서, 중국 후난성의 한 어부가 발견했으며, 복숭아꽃이 만발한
오늘도 필자는 글을 쓴다. 흔히들 작금의 때를 말세(末世)라 한다. 이 말세의 뜻을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일까. 이 말세는 지구촌의 종말을 뜻하는 게 아니며, 인생의 생각이 허망해지고 완악해져 더 이상 인생으로 하여금 기대할 게 없는 지경에 놓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이 허망한 세상은 말세를 만나 끝이 나겠지만, 끝나가는 세상 즉,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은 내세(來世) 곧 희망의 새 시대를 잉태하고 있기에 인생은 가는 세상과 오는 세상을 분별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해도 틀리지 않다.조선 중기 격암 남사고 선생은 이를 일컬어 ‘송구영
어느 독일의 철학교수와 대학생은 학교 캠퍼스에서 대화를 나눴다. 내용인즉, 교수는 학생에게 왜 사느냐는 질문이었고, 학생 대답의 결론은 죽기 위해 산다는 것이었다.학생이 그렇게 대답한 데는 누구나 다 나서 살다가 늙고 병들어 고생하다 죽는 것만 봤으니 자신 역시 그와 다를 게 없지 않겠냐는 의미였을 게다.다시 말해 인간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 속에서 속절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전제 속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우리의 생각은 정신(精神)이며 영(靈)이다. 그 생각과 정신과 사
서기동래, 조선 중기 유학자이면서 천문지리학자인 격암 남사고 선생이 남긴 말이다. 직역을 하자면 ‘서쪽의 기운이 언젠가 동쪽으로 온다’는 의미다. 이 말은 너무 막연하다. 이같이 동양선지자가 비책(秘策)을 통해 남긴 말의 참뜻을 이해하기 위해선 육천 년 비밀이 담긴 성경의 묵시(黙示)가 때가 되어 계시(啓示) 돼야만 알 수 있다.묵시가 때가 되어 계시되고, 천택지인(天擇之人) 한 사람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먹여줌으로 지상만민에게 하늘의 참뜻을 가르칠 수 있는 참 종교의 시대가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이다.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서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