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균우 왕인문학회 회장 소설가 아무리 어려워도 다 다닌 중학교는 졸업해야 되겠고 또 투자 중에 좋은 투자가 공부밖에 없으며 또 성적이 우수하니 성공이 환하게 보이는 확고한 투자가 아니냐고 말했다. 온갖 지혜를 다 짜내서 설득을 해 보았으나 그 다음 날도 결석이고 또 그 다음 날도 결석이다. 또 가정방문을 해서 설득을 했다. “선생님, 학비를 댈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학교에 가서 무엇합니까. 이왕 못 다닐 바에야 빨리 그만두는 것이 상책이 아닌가요?” 필자가 가진 능력으로는 설득이 되지 않았다. 역시 다음 날도 결석을 했다. 할 수
남균우 왕인문학회 회장 소설가 ○○여중으로 전근 간 첫해에는 1학년 1반을 담임하게 되었고 교과담당은 총 8학급 중에서 7학급을 담당했으니 정규수업만 28시간을 했고 보충수업 6시간에 특별활동 2시간을 합하면 36시간을 했다. 더구나 한 반에 70명씩이나 집어넣고 수업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 반 정도의 수업시수 즉, 부장교사는 15시간, 일반교사는 20시간 정도씩을 하고 있으니 지금은 교사들의 수업 부담이 많이 경감됐다. 선생님에 대한 대우가 그때에 비하여 파격적으로 개선되어 근무여건이 많이 좋아진 것이다. 그러나 그
남균우 왕인문학회 회장 소설가 1996년 4월 8일 학교에서 퇴근하여 병원을 들러서 늦게 집에 들어오니 내자가 쪽지를 내주면서 제자의 전화번호이니 전화를 걸어 보란다. 쪽지를 펴보니 김인식이라는 제자였다. 반갑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하고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몇 번 울리더니 전화를 받는다. “여기 서울” 하니까 벌써 알고 “아, 선생님이세요. 저 인식이에요. 저 기억하시지요?” “글쎄 이름은 확실히 기억나는데 얼굴은 확실하게 떠오르지를 않는구먼. 키가 아주 큰 편은 아니었고 아마 산수리 쪽에서 살았었지.” “
남균우 왕인문학회 회장 소설가 1980년에는 주안중학교로 전근을 갔다. 첫 부임을 하고 난롯가에 앉아서 오고가는 이야기를 들으니 학교에 ‘해골단’이라는 불온 서클이 있어서 두통거리라는 이야기였다. 이 해골단은 중학교로부터 고등학교 더 나아가 일반사회까지 조직이 뻗어 있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신문에도 여러 번 기사화되었던 샘골의 살인사건도 이 단체와 연결되어 있고 경찰도 뿌리를 못 뽑고 골치를 썩고 있는 무서운 조직이라고 했다. 본교에도 3학년에 6명이 있는데 우리 1반에 4명이 있다고 했다. 아무튼 몰랐다면 그대로 지나갔겠지만 안 이
남균우 왕인문학회 회장 소설가 지금도 농촌은 어렵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 때는 도시도 어려웠고 더군다나 농촌은 말할 수 없이 어려운 때였다. 지금은 중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90%이상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지만 그 때는 여학생의 경우 절반 정도가 중학교 졸업으로 만족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는 교복을 입던 시절이라 중학교 입학할 때 미리 넉넉한 크기로 맞추어서 졸업할때까지 입었기 때문에 중학교 3학년이 되면 교복이 깨끗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복천의 질도 형편없었다. 그런데 이인순 양의 교복은 유난히도 누렇게 바래서 흉할 정도로 퇴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