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牛), ‘소’하면 일을 떠오르게 하고 나아가 일꾼을 연상시키는 가축(家畜) 즉 육축(六畜: 소, 말, 개, 돼지, 양, 닭) 중 하나다.이렇게 접근하다 보니 우리가 말하는 소는 농부(주인)의 손에 이끌려 ‘밭 가는 소’가 아닌 ‘소같이 일하는 사람’을 이면에 두고 있었으니, 그 소는 소가 아닌 소같이 일하는 충직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이 대목에서 놓쳐선 안 될 깨달음이 있다. 밭 가는 소가 스스로 하는 게 아니고 주인(농부)에 의해 부려지듯이, 소 같은 사람 역시 누군가(주인, 농부)에 의해 부려진다는 사실이다.그래서인지 소는
신축(辛丑)년 하얀 소(牛)의 해도 한 달 하고 또 한 달을 남기고 있다. 어떤 이는 한 해가 더디 간다 하고 어떤 이는 빨리 간다 한다.더디 간다고 하는 이는 그 수고가 덧없이 지나갔을 것이고, 빠르다고 하는 이는 요긴하게 지나갔을 것이다.해가 그냥 떠서 그냥 지는 게 아니니, 생명을 주고 자라게 하고 결실하게 하니 만고불변의 이치다.그 이치에 부합된 이가 있고, 그 이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도 있을 법하다.저 들녘엔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마치 황금물결같이 일렁이며 추수군의 빠른 추수를 기다린다. 어디는 이미 추수돼 갔고, 어디
우주와 만유는 어디서 온 걸까. 참으로 궁금하다. 사도 바울은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라 했다. 이로 보아 우주 만물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 분명하다. 창조주 하나님은 영(靈)으로 존재하며(요 4:24),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신다(출 3:14).그래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일컬어 만유의 주재 곧 조물주(造物主)라 하며, 지음 받은 만물은 피조물(被造物)이라 한다. 이 피조물 가운데는 영(영계)과 육(육계)이 있다.이렇게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지으신
필자는 오늘도 이 세대에 권고하고 충고하고 권면하고 부탁하고 호소하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아직은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귀가 열려 듣게 되는 날이 있으리라는 강한 믿음 때문이다.익히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들이 지구촌을 엄습해 오고 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흔히들 재앙이라고들 말한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할 게 있다. 지난날 의례히 찾아오는 더위와 유행성 계절병과 같은 상습적 현상과는 분리해 생각해야 한다.종교가 증명해 주고 또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口傳)로도 짐작이 가능해지는 ‘그날’ 곧 말세며 말세현상이라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33)”고 했다. 또 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눅 12:56~57)”라고 했다.필자가 이 같은 글을 쓰는 데는 일반적인 글을 쓸 줄 몰라서가 아니다. 지금 이 시대가 듣고 읽고 알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없어질 글이 아니라
세월이 유수와 같다고 했던가. 신축(辛丑)년 새해가 밝아 온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첫 달이 다 지나가고 있다.금년은 소(牛)의 해다. 소는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우직함과 근면 성실함으로 주인의 농사일을 묵묵히 돕는 일꾼과 같은 상징성이 있다.이처럼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께서도 자신의 일을 돕는 데 있어 이 소(牛)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천우경전(天牛耕田)이란 말이 있는가 보다.그런데 우이독경(牛耳讀經)이란 말도 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일꾼도 있어 한 시대를 끝내야 하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이 시대 논객들이 자랑하듯 뽐내며 쓰는 글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적어도 필자는 이 세상의 아류(亞流, 독창성이 없이 뛰어난 것을 모방함)가 되고 싶지는 않다. 기왕지사(旣往之事) 아류가 될 바엔 낡고 쇠해 없어질 이 세상 헛된 것이 아닌 크고 높고 강하고 영원한 하늘의 진리를 전하는 아류가 되겠다.필자의 글은 필자의 생각과 뜻이 아닌 하늘이 이 시대를 위해 예비하고 택한 빛과 같은 천택지인이 목숨과 맞바꿔 싸워 이기고 받은 하늘의 계시(啓示)며 섭리며 생명이다(死卽生 生卽死). 따라서 이 글은 사람의
신축년(辛丑年) 새해, 섭리를 쫓아 어김없이 밝아왔다. 갓 보낸 지난 한 해, 지구촌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역병으로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버텨온 질긴 한 해였다. 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늘 희망과 새로운 다짐도 해봤지만 금년은 그럴 힘도 여유도 없다. 그래도 이겨내야 한다는 게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이처럼 곤고하고 곤란한 때 사람과 세상은 우리를 버릴지 몰라도 우리를 창조한 창조주께선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참된 희망과 구원이란 모두가 희망을 잃고 길을 잃고 의지할 곳 없이 방황하며 죽어갈 때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
이상면의 천지분간, ‘격암유록’ 해설하는 26번째 시간“천도경전(天道耕田), 하늘의 도(道)로 밭을 간다는 의미”“밭은 ‘사람의 마음’, 이 심령을 하나님 형상으로 재창조”“재창조된 자들 통해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가 ‘무릉도원’”[천지일보=김빛이나 기자] “하늘(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사연은 남사고가 기록한 격암유록 속에 다 담겨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한 때를 맞이해 하늘이 택한 한사람(천택지인)을 통해 시대분별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깨달아 알아서 천지를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지난 10월 3일은 국경일 중 하나인 개천절(開天節)이었다. 하지만 개천절 기념일의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고 남은 것은 오직 놀기 바쁘고 시위하느냐 마느냐가 관심거리였다.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대종교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고, 그 후 단군이 최초의 나라 고조선(古朝鮮)을 세웠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을 정해 개천절이라 명명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이 개천절은 고구려-부여-고려-조선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흔히 오늘날을 말세 또는 말세지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구촌 세상이 종말을 맞는다는 것인가. 무슨 종말이고 무엇이 종말을 맞는다는 것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왜 알아야 하는가. 종말을 맞아 모든 것이 끝장난다고 하니 말이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지금까지 가짜세상에서 가짜가 진짜를 가짜로 만들어 놨기에 가짜 인생들은 그 가짜를 진짜로 믿으니 세상은 가짜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이 만고의 이치다.이 세상은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지구촌은 물론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한 창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세상에는 이치가 있다. 하늘에도 진리가 있다. 즉, 콩 심은 데서 반드시 콩이 난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이치를 더 쫓아가 보면 콩 씨를 심는 때가 있고 자라는 기한이 있고 거두는 때가 있다.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있다. 이른 아침에 밭에 나가 씨를 뿌리는 목적이다. 이 세상 범사(凡事)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 없다. 즉, 그 목적은 씨가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어 결실하는 것이다. 그 결실이 주는 열매를 얻고자 농부는 이른 아침부터 밭에 나가 씨를 뿌렸던 것이다.그리고 그 열
“3월은 모춘(暮春)이라 청명(淸明) 곡우(穀雨) 절기로다.” 이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3월령이다. 모춘은 늦은 봄이며,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 춘분과 곡우사이로 4월 5일경이며, 곡우는 24절기의 여섯째로 봄의 마지막 절기며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이 윤택하여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절기의 때는 양력 4월로서 지금의 때를 노래한 것이다.그러고 보니 어릴 적 시골풍경이 새록새록 살아나며 밭에 나가 씨를 뿌리던 동네 어른들의 모습들이 오버랩 된다. 경작하는 농부는 이른 아침 밭에 나가 씨를 뿌리기 위해 묵은 밭을 갈아엎고 돌을 제
성경에는 사람의 마음을 ‘밭, 집, 그릇, 소’ 등으로 비유하고 있다(고전 3:9, 16~17, 롬 9:23~24, 고전 9:9~10 참고). 밭은 땅이며, 거기에 씨를 심어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는 것이 밭의 사명이다. 그런데 이 밭에 아무것도 심을 수 없거나, 심어도 아무것도 나지 아니하면, 그 밭은 소용없는 밭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씨가 있어도 아무 소용없거나, 또는 심어도 아무 소출도 없이 씨와 노력만 허비하기 때문이다.영적 밭도 이와 같아서, 영의 씨를 심어 그 씨가 자라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어야 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