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시는 일제 식민시대 이상화 시인의 대표적 저항 시다.‘빼앗긴 들’은 어디를 일컫는 것일까. 물론 원작에서의 들은 국권을 잃은 ‘조국’을 가리킨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성씨와 글과 말과 문화와 영토까지 말살당하며 억압받던 민족의 현실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국권 회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향토적 소재에 담아 나타낸 대표적 저항 시며,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시인의 고향이 지금 질병으로부터 고통 받는 대구다. 하지만 필자는 오늘날 ‘빼앗긴 들’에 또 다른 두 가지 의미를 담고자 한다.먼저 하나는 난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필자 역시 온갖 거짓과 음모가 들끓는 악한 이 세대에 ‘진실의 나무’ 한 그루를 심으리라.심겨진 나무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모질게 자라지만, 언젠가 열매가 맺혀 결실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인류 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이 있다. 인류는 시대마다 기득권을 가진 세력과 그 세력에 의해 핍박 받는 소수의 세력이 써내려가는 대하드라마와 같다. 그 드라마의 내용은 거짓과 진실의 싸움이었으며, 그 결과는 한결같이 진실이 승리했고, 그들은 소수였다. 그러나 승리까지의
오늘은 좀 특별한 글을 쓰고자 한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온 나라가 불안에 떨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리고 어쩌다 코로나사태의 한 중심에 신천지가 있으며, 나아가 31번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한 여인이 있게 된 걸까. 이 여인은 중국인을 만난 적도 없고, 중국에 다녀온 적도 없다. 뿐만 아니라 이상 증세를 호소하기 위해 정부가 지시하는 대로 선별진료소를 찾아가 초기 검진을 의뢰했으나 중국에 다녀온 적이 없다는 이유로 검진을 거절당했다. 즉 이미 병이 퍼진 후 진단을 받게 됐고, 확진 환자로 리스트에 올라갔다. 심지어
4.15총선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각 당은 후보자 물색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여당은 야당 심판, 야당은 여당 심판, 이것이 선거 전략이다. 참 간단명료해서 좋다.이 주장대로라면 여야 할 것 없이 국민들로부터 심판의 대상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자 그렇다면 국민들은 어떻게 심판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 양쪽 다 심판의 대상이 틀림없다.먼저 현 정권과 여당이 일련의 언행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 것은 거짓과 위선과 교만이다. 특히 조국사태를 보면서 상식과 도덕과 정의의 기준을 맘대로 바꿨고,
지구촌이 심상치 않다. 우한폐렴 곧 신종코로나로 인해 사망자가 800명을 넘어섰고 확진자가 3만명을 넘어섰다. 나아가 안전지대 없는 세계는 급기야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은 독감으로 인해 최근 1만명 이상 사망했으며, 동부 아프리카 전역에는 메뚜기떼가 급습해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호주는 최악의 폭염으로 인한 화염에 30명 이상이 생명을 잃었고 수도 캔버라까지 위협하면서 역시 비상사태가 선포됐다.어찌 이뿐이겠는가. 파키스탄은 기상재해로 16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났고, 브라질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등 각국에선 홍수와 화산폭발로 각각 수
대통령 적합도 조사에서 어느 날 윤석열 검찰총장이 2위에 등극했다. 그것도 유력한 야당 지도자 황교안 대표를 앞지르는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기현상이 아니라 합당한 현상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정작 윤 총장은 언론사에 제발 자신을 대선후보명단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부탁을 한다. “정치는 안 하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전달하면서 말이다.과거 청문회 때도 정무감각이 없다고 한 발언이 새삼 떠오르게 하는 발언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고지식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주관이 분명해 보이기도 한 그의 행사를 보노라면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는 세상. 참으로 세상은 요지경이다. 진실과 사실 유무를 떠나 내 편의 주장은 맞고 상대편의 주장은 이유 불문하고 거짓이 되는 이상한 세상에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 안타깝다.이 같은 현상은 지구촌 그 어디보다 심각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니, 거짓과 미혹과 유혹의 여신이 이 강산 위에 다 집결해 있는 모양새다.유사 이래 이런 적은 없었고 이런 정권도 없었다. 예전이라고 혼란할 때가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혼란한 때는 으레 참 지도자가 나와 백성들에게 시대를 분별케 하고 희망을 제시하는
청와대와 검찰, 법무부와 검찰, 일련의 게임을 통해 국민들은 불안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편하다. 왜 이런 나라가 돼 버린 걸까.지난 10일 청와대는 윤석열 검찰의 압수수색을 거부했다. 검찰은 울산시장 부정선거 의혹 관련 청와대 자치발전 비서관실을 찾아 전격 압수수색에 들어가려 했으나 청와대의 거부로 8시간 만에 빈손으로 철수했다.청와대는 검찰이 요구한 자료를 특정하지 않고 마구잡이식 수사를 한다는 것은 보여주기식 수사라며 강한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압수수색은 검찰이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며 법원의 영장 발부가 있어야 진행할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즉, 태산이 떠나갈 듯 요동쳤으나 뛰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라는 고사다. 이는 검찰이 지난해 마지막 날(31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불구속 기소한 데 대해 청와대가 “대통령의 인사권을 흔든 수사였지만 결과는 너무나 옹색하다”는 격앙된 반응을 내놓으며 인용한 말로 세간에 크게 회자됐고 지금도 진행형이다.조국 일가의 기소를 예단하고 시작된 ‘피의사실공표죄’ 논란이 벌써 옛날 얘기가 됐단 말인가. 현 정부는 자신들의 유불리에 따라 법리를 마음대로 해석한다는 지적이 예사롭지 않게 들려오는 이유다.조국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렸던 한 해였던가. 아니 어쩌면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 싶었던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본다면 다사다난이란 단어는 너무 사치스런 표현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인용해 본다.참으로 어지러웠던 지구촌, 혼란과 혼돈을 넘어 눈뜨면 마주하는 사건과 사고 나아가 죽음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이 일상인 세상이 돼 버렸다.그러한 가운데서도 설상가상인 것은 개인과 사회 나아가 국제관계는 더욱더 이기적이고 심지어 국수적 자세와 임전태세로 무장돼 가며 내일의 문을 견고하게 걸어 잠그고 있다는 이
교수들은 2019년을 마감하며 ‘공명지조(共命之鳥)’와 ‘어목혼주(魚目混珠)’라는 사자성어로 한 해를 뒤돌아봤다. 공명지조는 불교 경전의 아미타경에 나오는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 즉, 머리는 둘이지만 목숨을 함께하는 공동의 운명을 가진 새를 가리킨다. 머리 하나는 낮에 일어나고, 머리 하나는 밤에 일어나는 성질을 가진 상상속의 새다. 낮에 일어나는 머리는 몸을 위해 좋은 열매를 챙겨 먹는데 반해 다른 머리는 반대로 이기심과 질투심으로 인해 독이 있는 열매를 먹게 되니, 결국 한 몸이기에 그 독으로 인해 두 머리를 가진 상
약 2천년 전 예수께선 따르는 무리에게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별할 줄을 알면서 어찌하여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눅 12:56~57)”고 외쳤다. 이 음성은 오늘 이 시대를 향해 더 짙고 강한 어조로 다가온다.하나님은 육적이스라엘이 아담같이 언약을 어김(호 6:7)으로 구약 선지자들을 찾아가 장래 이룰 일을 약속했으니 바로 ‘새일 창조(렘 31:22)’다. 이 약속은 두 가지 씨 뿌리는 일(렘 31:27)이며, 새 언약하는 일(렘 31:31)이었다. 예수님은 약
흔히 오늘날을 말세 또는 말세지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구촌 세상이 종말을 맞는다는 것인가. 무슨 종말이고 무엇이 종말을 맞는다는 것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왜 알아야 하는가. 종말을 맞아 모든 것이 끝장난다고 하니 말이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지금까지 가짜세상에서 가짜가 진짜를 가짜로 만들어 놨기에 가짜 인생들은 그 가짜를 진짜로 믿으니 세상은 가짜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이 만고의 이치다.이 세상은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지구촌은 물론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한 창
세상은 왜 이렇게 분탕질 치며 살아가야 할까.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이 같은 의문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는 삶이란 그저 습관처럼 살아 왔으며, 왜 살아야 하는 건지 향방이 없고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문을 던져보자. 과연 세상은 이런 것이며, 이렇게 살다 죽는 게 인생이며 인생이 목적한 바인가. 분탕질 속에 사는 우리에게 분탕질 대신 고요와 평화는 요원한 것인가. 아니다. 원래 세상은 고요와 평화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떤 사연으로 인해 분탕질 치며 살아가야 하니 우리 자신들 생각의 결과며 그야말
2019년 12월, 기해년이 저문다. 흔히들 송구영신(送舊迎新)을 말한다.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온다는 의미다. 아니 더 나아가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한 시대가 온다는 말이 더 맞을 듯 싶으니 그것이 송구영신의 참 뜻이며 의미이기 때문이다.말하고자 함은 2019년 12월, 그리고 고대하며 맞이하는 2020년, 이는 앞서 말한 송구영신의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는 것은 왜 가야 하고 오는 것은 왜 와야만 할까. 이 또한 사람의 뜻이라기보다 우주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의 섭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가야
예부터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는 말이 있다. 글만 읽어 얼굴이 하얀 선생을 말하며, 이는 글과 말로만 하고 자기의 행실과는 일치하지 않은 표리부동한 사람을 풍자한 표현이다.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선비’가 있다. 우선 선비 그 자체로는 백면서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로 지금까지 회자돼 왔지만 이 선비가 선비정신으로 그 의미가 옮겨질 때는 인격적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또 세속적 이익보다 대의와 의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숭고한 정신이며 정의의 사도다.오늘날 대한민국 아니 세계 어디서도 선비와 그 정신을
지금껏 살면서 ‘정의’란 단어가 요즘처럼 많이 회자돼 본 적이 있었던가. 아이러니한 것은 자칭 정의로운 사람도 그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모인 조직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때라는 점이다. 진보와 정의의 심볼로 인식돼 왔던 ‘정의당’이란 정당이 있고, 이 정의당은 마치 정의의 가치를 독점해 왔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뿐만 아니라 자칭 진보를 앞세운 문재인 정권과 여당 역시 별반 다르지는 않다. 그런데 정의를 독점해 온 진영에서 가장 정의롭지 않은 이율배반적이며 모순된 사건이 그 어느 정권보다 더 심각하게 발생하며 국민을 우롱
11월 9일(土)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역사적인 날이며, 이 사건이 갖는 의미가 우리에게 남다르게 와닿는 것은 왜일까.오늘이 또 다른 하나의 의미를 갖는 것은 힘들게 쟁취한 문재인 정권이 출범, 그 릴레이를 시작해 이제 반환점에 도달한 날이라는 것이다. 마라톤의 이치가 그러하듯, 이제 그 힘과 동력은 소진되고 끝까지 어떻게 힘을 배분해 꼴인 지점을 무사히 통과하느냐가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따라서 긍정과 부정의 입장표명이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가운데, 이제 뛰어온 코스를 한번 복기해 볼 필요성이 대두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과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는 경서의 말씀이 스쳐간다. 태고이후 이런 일은 들어 본 적이 없고 또 살아생전 처음 보고 겪는 대 사건이 눈앞에서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세상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싸우고 죽이는 일이 늘 일상처럼 오늘도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요즘 약 한 달여에 걸쳐 세상과는 구별되는 하늘의 음성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광경을 봤기 때문이다. 세상은 마치 잠을 자는 듯 고요하지만 위의 경서의 말씀처럼 하늘은 한 때를 맞아 하늘의 목적을 완성지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르게
강 하나를 두고 두개의 진영이 매일 또는 매주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미친 듯이 일방적인 주장만 하고 소리치는 나라, 대한민국의 현주소다.지난 박근혜 정부 때는 국민 모두가 하나 되어 정부를 향해 소리쳤지만, 현 문재인 정부 하에서는 마치 배수진이라도 친 듯 극렬하게 대치되는 두개의 엇갈린 주장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미친 듯이 설치고 있다. 지난 정권은 부정과 부패로 잘못되니 국민은 하나로 모아졌고, 현 정권은 잘못되니 일사불란하게 두개의 국민으로 양분돼 결사항전을 방불케 하고 있다.앞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됐고, 뒤는 설상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