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정의 현주소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총체적 난국’이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일 게다.콘크리트인 줄로만 알았던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지지율이 한없이 추락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현 정권은 국정 전반에 있어 실물과 같은 현실적 운영 능력의 한계가 드러났고, 국민들은 현 정권의 민낯을 정확히 파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가능해진다. 현 정권과 그 세력이 투쟁 일변도 이념으로 무장해 오직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세 규합에만 함몰돼 왔다는 것이다.따라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과 같이, 문
‘풀은 밟으면 밟을수록 더 무성해진다’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국가는 곧 국민이다.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가슴에 대못이 박힌다’고 말한다. 지금 이 나라 대한민국엔 그와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과 단체가 있다. 대한민국은 법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이기에 법치국가다. 법치국가의 법은 힘 있는 강자와 권력 가진 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힘없는 백성이 그 법으로 보호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대한민국의 법은 권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중략…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
합천 해인사에 소장된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고려가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만인 1251년에 완성한 것이다. 당시 대장경을 조성하게 된 배경은 몽골군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민족적인 염원에서 흩어진 민심을 불심(佛心)으로 통합하여 한자 한자 정성을 기울여 판각하였으며,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필자는 대장경을 말하고자함이 아니며 대장경 조성이 주는 교훈을 나누자는 것이다. 적은 외부로부터 침략해 오는 적이 있고, 국론이 분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학문이 있다. 모든 것이 필요하기에 존재할 것이다. 오죽하면 공자는 논어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하였던가. 또 안중근 의사는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라 했던가. 나아가 고산 윤선도 선생은 유배생활 중에서도 ‘락서재(樂書齋)’라는 글방을 만들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기쁜 마음으로 학문 익히기를 즐겨하지 않았던가.그런데 필자는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그때에 합당한 양식이 있다고 말이다. 하루 간에 먹는 양식도 아침과 낮과 저녁이
오늘은 좀 색이 다른 글을 쓰고 싶다. 며칠 전은 6.25 70주년이었다. 70년 전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영문도 모른 채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의 흉탄에 쓰러지기 직전, 당시 애절한 심정과 다급한 상황을 담아 어머니에게 부치려 했지만,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를 70년이 지난 오늘 이 지면의 여백을 통해 대신 부치고자 한다. 어머니에게 쓴 부치지 못한 편지 학도의용군 이우근1950년 8월 10일 쾌청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그것도 돌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十(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
평화통일은 요원하기만 한 건가. 신기루와 같이 꿈과 환상에 지나지 않은가.지난 6월 15일은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이었지만 다음날인 16일 오후 2시 49분, 2년 전(2018.4.27)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 마주 앉아 극적으로 일궈낸 남북화해의 상징이자, 남북 성과 중 가장 괄목할만한 결실이며, 향후 남북 평화 교류의 물꼬와도 같았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30초 만에 큰 굉음과 함께 사라지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우리 국민은 경험해야 했다.북한은 대남관계에서 대적관계로 전환하겠다던 호언을 한 지 3일 만에 이를 전격 단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의해 8분 46초 동안 무릎으로 목 눌림을 당해 사망한 사건이 지금 지구촌을 달구고 있다. 약 6개월 동안 핫이슈를 선점해 오던 코로나19 사태는 이번 흑인 사망 혹은 미국 폭동이라는 이슈로 말미암아 그 자리를 빼앗길 지경에 처했다.미국을 위시한 지구촌의 인종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미국의 인종갈등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 된 남북전쟁이 증명하듯이 지구촌 인종갈등의 상징처럼 인식 돼 왔다.그러한 인종갈등은 분쟁과 전쟁의 불씨가 되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이 늘
근본도 모른 채 버려지고 나그네 된 인생들이 있네.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방황하는 길 잃은 철새 같은 인생들이 있다네.무심히 가고 오는 세월의 길목에 서 있어도 소경되고 귀머거리 된 채 분별치 못하는 가여운 인생들이 바다를 이뤘네.천지분간 못하는 군상(群像, 떼를 이룬 많은 사람)앞에 나침반이 되고 길이 돼 나타났어도 세상은 그를 철저히 외면하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런가.아니 외면을 넘어 핍박과 저주와 돌팔매질로 자신들의 양식 삼고 있으니 각골통한(刻骨痛恨)이라.어느 시대나 그리 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죄 없어도 죄
韓, 코로나19로 방역모범국가국가 위상까지 높아져 고무적피해자인 신천지엔 온갖 압박정치적 목적위한 기득권 추태코로나19가 찾아 온지 4개월을 훌쩍 넘겼다.세계적 사태추이를 볼 때, 어차피 코로나19에 대한 근본적 해결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다. 따라서 코로나19 이전의 삶에서 이후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모색해야 한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인류는 사람의 힘이 아닌 하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바꿔놓고 있다는 현실을 깨
6월이 오면 온 산하가 핏빛으로 물들었던 그 때 그 날을 기린다. 오늘 우리는 이처럼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을 아무런 부담 없이 맞이하고 즐기고 있지만, 오늘의 이 아름다운 강산이 있기까지의 그 과정엔 별 관심들이 없다. 피로 싸웠고 이겼고 지켜왔으니 피로 만든 강산인데 말이다. 그런데 어찌 눈에 보이는 전쟁만 있고 피 흘림이 있겠는가. 눈에 보이는 전쟁보다 더 참혹한 전쟁과 피가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전쟁을 말하고자 한다.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을 익히고 이를 통해 새것을
정의(正義), 왠지 듣기만 해도 건전해지고 숙연해지고 다짐하게 하는 묘한 힘과 매력을 가진 단어다. 모든 단어와 글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이 정의란 단어는 ‘문화(文化)’라는 단어가 말하듯이, 정의라는 글이 실제 정의로움으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실체를 연상케 하는 아주 경건한 단어다.이처럼 숭고한 단어가 언젠가부터는 아주 추하고 비겁한 사람과 세력의 전유물이 돼 있음을 생각할 때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정작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자신을 정의롭다 말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세상은 거짓과 위선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됐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뜻하지 않은 손님, 코로나19가 우리 곁에 찾아온 지 벌써 4개월을 맞는다. 짧다면 짧은 이 기간에 내 자신은 물론 우리, 나아가 사회와 나라 온 지구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의 계획으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현상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데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모든 일에는 긍정과 부정이 상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긍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도 적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코로나19로 희생당한 분들이 계시기에 조심스런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희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지나갔고, 또 몇 날이 지나면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스승’이라 함은 자기를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을 일컫는 고귀한 단어다. 세상이 혼탁해져 갈수록 잊지 말아야 할 단어가 바로 스승이라는 단어다.특히 우리 민족은 예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려 져 왔으며,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배워왔다. 그만큼 스승은 자신에게 있어 하늘만큼 위대하고 귀한 분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언젠가부터 스승에 대한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하며 심지어 스승을 모독하는 현실에까지 이르렀다
세상은 참으로 하 수상(殊常: 몹시 괴이하고 뒤숭숭함)하다. 추측은 무성하지만 알 수 없는 질병이 팬데믹(세계적 유행)화 되며 인간의 편리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이기적 문명을 정지시키고 지구촌의 모든 질서를 한순간에 멈춰 세워놓고 있다.“태산이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라는 시조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순간이다. 인생을 자랑하지 말라는 글귀도 스쳐지나간다.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현장을 하늘은 우리에게 생생하게 목도하게 하며, 우리는 언젠가부터 생명의 존엄성마저 상실해지고 또 무너져 가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허무
지구촌 전역을 휘감고 있는 어둠의 그림자는 과연 언제쯤 멈출까. 지금, 이 순간도 속절없이 병마로부터 희생당하는 인류를 생각하면 먹먹할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진정국면 내지 소강상태를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모두의 희생이 만들어낸 결과라 하겠지만, 긴장의 끈을 더욱 바짝 졸라매야 한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이 어둠의 그림자가 언제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이 내리는 재앙 앞에 우리는 그저 보잘것없는 인생일 뿐이다. 그러니 한없이 겸손하고 낮아지고 사랑해야 하며 무엇
대재앙으로 엄습해 인류의 모든 생각과 일상과 기능을 마비시키며 멈춰 세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매우 궁금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 ‘코로나(Corona)’라는 이름은 인류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함께해온 친숙한 단어다.예부터 국내는 물론 세계 유명브랜드에는 어김없이 ‘코로나’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유명 호텔·백화점·자동차·맥주 등이 그 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 자동차 회사인 ‘새나라 자동차’ 이후, 오늘날 한국 GM의 전신인 ‘신진자동차’가 탄생해 1960년대 ‘코로나’라는 자동차를 출시해 국내 자동차 대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한 뒤에도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일이 커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마스크 착용 여부는 나라마다의 문화적인 차이일 수 있기에 건강한 사람은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가진 나라가 있는가 하면, 젊은 사람은 괜찮다는 인식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아 감염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WHO가 팬데믹을 선언했다는 것은 코로나19는 전 세계가 함께 힘을 모아 헤쳐 나가야 할 인류의 재앙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의미다. 오늘과 지금이 그렇다. 봄이 상징하는 생명과 희망보다는 모든 것이 막혀있고 어둡고 그늘지고 적막하다. 만물은 제철을 만나 잎을 내고 꽃을 피우며 저마다 자기의 역할을 다하며 다가오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거리두기’라는 말이 생긴 것처럼 순식간에 모든 것이 갈라지고 멀어져 가고 있다. 이 강산뿐만 아니다. 지구촌(村)이라 했으니 언젠가부터 세계는 마을의 개념처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이젠 나라마다 빗장을 걸어 잠그며 분리를 넘
구한말 단재 신채호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을 남겼다. 경서에도 마지막 때가 아담, 노아, 모세, 예수 초림 때와 같다고 했고, 사도 바울은 “저희에게 당한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다.지나간 역사는 그저 역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늘 세대를 위한 반면교사였음을 깨닫게 한다.이천 년 전, 예수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자기 땅에 왔다. 하지만 당시 그 시대는 예수를 향해 세상을 소란케 하는 이단의 괴수며 뱀이라며 온갖 죄를 뒤집어 씌워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는 진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