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핵우산정책과 미국의 우량한 군사력과 혈맹적 우호 속에 한반도는 평화가 유지되고 있어 보인다.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그 그늘아래서 세월이 흘러 그나마 평온을 찾아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좀 더 진실을 알고 깊이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금번 북의 연평도 공격이 우리에게 일깨운 또 하나의 교훈이 잠시나마 잊었던 역사의 진실을 되살리고 있다.이번 사건으로 인해 우리에게 귀에 익숙한 단어가 있다. 즉 ‘자위권’이다. 자위권(自衛權)이란 ‘개인이나 국가가 급박한 침해를 받을 시
21세기는 국경을 넘어 다민족이 하나 되고, 문화가 공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타 민족도 아닌 동족끼리, 강력한 선을 긋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립과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남한의 교도소와 유사한 북한의 ‘교화소’엔 1200명 정도가 수감돼 있는데, 그 이유는 남한의 영화나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다. 남한의 대중문화의 인기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이를 차단키 위한 수단이다. 불쌍하고 어리석은 집단이다. 이는 시대의 순리와 만물의 섭리를 거역하고 역행하는 무지와 무식의 소치요, 자멸의 첩경임을 어찌하면 깨닫게 해
수천년 지배해 오던 물질의 시대에서 정신이 지배하는 시대로 옮겨지는 시대의 끝과 또 시작점에서, 세계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모아지고 있는 한 곳이 있다. 바로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이 한반도다. 온 지구촌이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또는 인류공영을 위해 도전과 응전을 거듭하며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 때, 유독 이 한반도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소위 ‘악의 축’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 한 피를 받은 동족으로서도 이해와 납득이 선뜻 가지 않는 일들이 연일 이 한반도를 아니 온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10시 담화문을 통해 무고한 민간에게 포탄을 날린 북한군의 공격은 명백한 ‘반인륜적 범죄’라 규정지었다. 북한은 휴전 후 지금까지 청와대 기습사건,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 사건, KAL기폭파 사건, 도끼만행 사건, 아웅산 사건, 수차례에 걸친 서해 NNL 교란사건, 금년 3월 천안함 폭침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교란과 침투를 해 옴으로 남측을 괴롭혀 왔다. 그래도 우리는 인내해 왔다. 하지만 이젠 그 인내의 한계에 왔다. 따라서 이젠 북한의 그 어떠한 추가 도발에도 말로써가 아닌 행동으로 반드시 보복
연평도, 주민들에겐 아니 우리 모두에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60년 전 악몽의 그날을 또다시 떠올리게 한 평화롭던 작은 섬, 그곳엔 대량 인명살상을 목적으로 한 방사포가 연평도의 궤멸을 목적으로 치밀하고 의도된 공격으로 감행됐다. 무차별 공격으로 아까운 젊은이의 희생 또한 감수해야 했고, 어민들은 생활의 터전을 버리고 마치 실향민의 신세로 전락해 정든 섬을 떠나고 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면서 연평도민들의 생활안정이 조속히 해결되길 우선 바란다. 언제나 소를 잃고 난 후에 외양간을 고치려 하던 습관적이며 관행적 사고에서 제발
얼마 전 취재차 전북 부안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엔 신라가 삼국 통일 당시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머무른 곳이기도 한 ‘내소사(來蘇寺)’란 천년고찰이 있다. 백제 무왕 34년에 중건된 이 절은 조선 성종 때 지은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과 고려 문인 백운거사로 유명한 이규보의 ‘남행일기’엔 ‘蘇來寺(소래사)’라 적혀 있다. 그 내소사 앞엔 넓은 변산반도가 펼쳐져 있고, 거기엔 중국의 이태백이 배를 타고 놀다 죽은 채석강과 흡사하다 하여 바다임에도 ‘채석강’이란 절경이 있고, 또 중국의 적벽강
세계는 지금 무엇인가를 향해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이 달리고 있다. 그 끝에 있는 인류의 소망을 향해 달리고 있을 것이다. 이같이 빠르게 흐르는 기류에 편승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낙오자요 무한한 축복의 미래는 요원하다. 성서의 말을 빌리자면 천기는 잘 분별하면서도 이 세대를 또는 옳은 것을 분별치 못하는 이천 년 전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질책하신 예수의 말이 떠오르는 시점이다. 떠오르는 이유는 예수가 다시 오실 때에도 이천 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믿음 가진 자를 보지 못할 것임을 미리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때도 이 땅엔
‘세계대전이다’ ‘세계 대공황이다’ 등 지구촌의 큰 재앙과 사건을 겪을 때마다 세계는 그 해결책을 위한 공동의 노력의 필요성을 느끼며, 국제연맹 또는 국제연합(UN) 등 각종 세계기구를 창설해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기능 또한 없진 않았지만 인류공동 번영을 위한 노력을 꽤 해온 게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서 현 시점에 와서도 역시 경쟁적 경제성장이 낳은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자연 파괴, 그로 인한 급속한 천연재해, 기후변화, 금융위기 등으로 각국의 파산 경고 등 또 하나의 새로운 경제 및 세계질서가 시급히 요구되는 현실에 직면했다.
드디어 ‘G20 정상회의’의 막이 오른다. 필자는 그동안 이 회의의 성격과 의미 그리고 중요성에 대해 지나치리 만큼 많은 강조를 해왔다. 그 이유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기 때문이었을 게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또 속담엔 ‘버스 지나간 뒤에 손들지 말라’는 말도 있다. 그동안 정부와 온 국민이 함께해온 준비가 결실로 잘 나타나길 바랄 뿐이다. 이제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 회의가 끝난 후의 우리의 자세와 역할이다. 행사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결의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하며, 회의의 결과를 현실로
요즘 온 국민의 마음은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론 조심과 염려의 마음도 함께 하리라 여겨진다. 개국(開國) 이래 이보다 더 큰 국가적 세계적 행사는 아마 없었기 때문이다. 스포츠나 예술적 차원의 행사는 있었겠으나, 경제를 통한 경영, 기후변화와 환경, IT,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아우르며 글로벌시대의 미래를 전 세계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장이 이 한반도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롭고 괄목할 만하다. 봉건주의 사회주의를 거쳐 동서의 이념에 의한 팽창주의와 군사적 충돌
모처럼 정치권의 초당적 지지 결의안을 채택한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 이제 그 서막이 며칠 앞으로 다가 왔다. 정치권은 물론 온 국민의 여망이 담겼으며, 전 세계인의 기대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다섯 번째를 맞게 되는 이번 정상회의는 그 어느 때보다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경험한 세계는 종전 G7(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과 다르게, G7은 물론 신흥국을 포함, 그야말로 글로벌 20 정상회의(아시아- 대한민국,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중남미-아르헨
어지러운 국내 및 국제 환경 속에서도 그나마 마음을 설레게 한 일이 있었다면 일본이 궁내청에 소장 중인 조선왕실의궤를 반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간 문화재를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치 선심 쓰듯 반환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는다. 또한 반환이라는 표현보다는 환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할 것이다. 이번 일본의 ‘의궤 반환’은 어쩌면 예견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올해는 나라를 빼앗긴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로부터 주권을 침탈당하면서 우리 민족의
해마다 10월 말이면 ‘종교개혁 주간’으로 16세기 부패했던 중세 종교상을 짚어보며, 오늘날의 종교 즉, 기독교의 부패상을 꼬집어 가며 너도나도 개혁과 갱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외치는 자는 많으나 그 부패와 타락의 골은 점점 더 깊어만 가니, 그 외침은 정녕 허황된 소리요, 알맹이 없는 울림으로 그친다. 1517년 10월 31일 정오, 루터는 면죄부의 해독을 주장하며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게시판에 ‘95개조의 항의문’을 게시했다. 이 항의문은 공개된 지 2주 만에 독일을 덮었고, 4주 만에 전 구라파를 불 질렀다. 물론 이를
세계화시대 지구촌시대 글로벌시대, 이런 용어는 이제 이 시대의 필수용어가 됐다. 중요한 것은 그 용어의 중심에 나 또는 우리가 서 있어야 하고, 나아가 주역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회자되는 속담 중엔 자기 생각에 갇혀 있는 경우를 ‘우물 안에 개구리’와 같다고 한다. 무한하며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건만, 사람이 파 놓은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는 내가 보고 있는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가 던지는 책망적 교훈이다. 결국 자기 아집과 집착에 빠져 진실과 진리는 먼 데 있고, 착각 속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우회적
요즘 종교계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표면적 퇴진과 함께 교내 세력 내지 재산권의 치열한 다툼의 조짐이 엿보이기 시작한다.뿐만 아니라 기성교회 역시 수많은 단체가 난립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총’과 같은 거대 기관을 또다시 만들어 극단적 분열을 조장하고, 명예와 권력욕의 진수를 보이고 있다. 종교의 말세마다 나타나는 전유물이라는 지적이 의식 있는 이들로부터 나오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민족성 자체가 종교성이 많
우리나라의 정 반대편이며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 두 달여 전 산호세 구리 광산이 붕괴되고, 땅 밑 700m 갱도엔 33명의 광부들이 갇히게 되었고, 그 후 69일 만에 33시간의 치밀하고도 정교한 구조과정을 거쳐 19살에서 63세까지의 침착했던 33인의 영웅들은 국민들과 아니 온 세계와 함께 기적의 순간을 연출하며 가족의 품으로 생환했다. 인명경시 풍조와 함께 지구촌 곳곳에서 수많은 인재(人災)와 천재(天災) 그리고 각종 분쟁으로 인한 인명살상이 서슴지 않고 자행되는 이때, 그야말로 생명의 소중함과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
며칠 전 564돌 한글날을 맞았다.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풍성하게 열렸다. 특히 금년은 그동안의 민간의 끈질긴 활동으로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민족의 언어로 채택함으로, 그동안 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있음에도 글이 없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위기를 맞고 있었으나, 한글을 받아들임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많은 민간단체와 자원봉사의 손길은 말은 있어도 글이 없는 문맹국을 찾아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보존케 하며, 또 현실의 눈을 뜨게 하고, 또 한국을 알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통일교 일본인 여성들에 대한 반인륜적이며 반종교적인 인권침해의 참상이 지난 6일 ‘SBS 뉴스추적’을 통해 고발됐다. 시대를 역행하는 가해자의 주체는 오늘날의 개신교였다. 그리고 통일교에 대한 강압적인 납치 감금사건은 지금 이 순간도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뉴스추적을 통해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부인들을 대상으로 일본 가족들과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 연계해 방대한 배후납치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연계된 개신교 개종목사들은 개종작업비로 1300만 원(100만 엔)을 요구했다고 밝혔
며칠 전 개천절이 지나갔다. 개천절(開天節)이라 함은 ‘하늘이 처음 열린 날’ 또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 선 날’을 의미한다. 세상의 나라가 설 때는 개국(開國) 또는 건국(建國)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개국일 대신 개천절을 정해 해마다 절기로서 지켜 내려오고 있다. 이 세상 그 어느 나라도 이같은 절기를 지키는 나라는 아마 없으리라 본다. 오직 우리 민족뿐이 아닌가 싶다. 말대로라면 이 나라가 선 것은 이 땅의 나라가 선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해와 하늘의 뜻이 펼쳐진 터전이요 민족이었음을 어렵잖게 발견할
종교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주다. 사회가 있기에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사회가 병들어 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종교의 몰락으로 세상은 피폐해지고, 정의와 진실은 외면당하고, 거짓과 부정이 판을 치는 사회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젠 이런 경고를 아무리해도 소용없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올 뿐이다. 소귀에 경을 읽고 있는 형국이 된 현실 앞에 속수무책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들을 귀가 있는 이가 있다면 들으리라는 생각에 오늘도 호소해 본다. 세계에서 종교 활동 내지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