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어떻게 귀한 부처님의 말씀을 한글로 번역할 수 있단 말이오.” 용성스님(1864~1940)이 불경을 한글로 번역할 당시 주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천한 것으로 취급받던 한글로 불경을 번역하게 되면 품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스님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뜻을 꿋꿋이 이뤄갔다. 그 결과 ‘금강경’ ‘화엄경’을 비롯해 30여 종의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했으며, 불교계에 처음으로 ‘찬불가’를 만들어 보급했다. 용성스님은 조선 말,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다양한
이규식 성주 이씨 대종회장 인터뷰 고려 말 대표적인 유학자 세 명 ‘고려삼은’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현재 일부 사전에선 ‘고려삼은(호 끝에 ‘은’ 자가 들어간 고려 말의 대표적인 유학자 세 사람)’을 이렇게 꼽고 있다. 하지만 그간 ‘야은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을 삼은에 포함해야 한다는 반론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숭인의 가문인 성주 이씨 대종회 역시 이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알리기 위한 노력을 펼쳐왔다. 이러한 주장이 대두된 배경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이규식 성주 이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우리나라 천주교의 전래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일로 꼽힌다.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닌 서적을 통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점 때문이다. 18세기,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은 중국(당시 청나라)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을 통해 새로운 문명에 눈을 뜨기 시작하며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그 중심에 조선 천주교 창립의 주축이 된 광암 이벽(1754~1786)이 있다. ◆유교 강학에서 천주교 전파 이벽은 성리학적 이념의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사상을 찾고 있었다. 이에 벼슬길을 거부하며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너나 잘해.”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 “너나 잘하세요”가 언뜻 떠오르지만, 이는 효봉스님이 평소 강조하던 법어 가운데 하나다. ◆“남의 잘못 들춰내지 말라” 어느 날 한 제자가 효봉스님에게 다른 스님의 잘못을 고자질하러 왔다. 이는 평소 계율을 강조했던 효봉스님의 뜻을 염두해 둔 것이었다. “스님, 스님들 중 술 마시고 여자를 만나는 스님이 있습니다. 이를 바로잡으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효봉스님은 무덤덤하게 “네가 보았단 말이지?”라고 되물었다. 그리고는 “네, 스님” “수행자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백설(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엿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노래한 이색의 시조다. 탄식과 함께 매화에 빗댄 ‘우국지사’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고려 말 유학자로 ‘부벽루’와 같이 문학사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을 다수 남겼을 뿐 아니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킨 인물이었다. 고려 삼은(三隱) 중 한 명인 그의 가르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지난 일은 한낱 춘몽 같고/ 남은 날은 지는 석양 같구나/ 일편단심 원하는 것이 있다면/ 주를 위해 미친 듯이 사는 것뿐이라.” 3년여 전, 신석구(1875~1950) 목사를 추모하는 칸타타(악극 형식의 교회 음악)가 연주됐다. 이는 실존했던 한국인을 다룬 교회용 칸타타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신석구 목사의 삶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며, 그의 발자취를 기억하려는 사람이 많음을 보여준다.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 신석구 목사는 종교인으로서 신념을 지키고자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 민족의
ㆍ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경허스님이 만공스님(滿空 月面, 1871~1946)과 함께 시주를 받고 절로 돌아가고 있던 때였다. 오래 걷기도 했고, 시주 자루가 무거웠던 탓에 만공스님이 “스님, 다리도 아프고 자루가 무거워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경허스님은 갑자기 밭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일하던 아낙네 한 명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낙네의 남편이 화가 나 소리 지르며 죽일 듯이 쫓아왔고, 이를 피해 두 스님은 힘껏 산으로 도망쳤다.이후 만공스님이 왜 그러했는지를 묻자 경허스님은 “다 자네 때문이었네. 놀라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붉은 십자 표시를 단 군사들, 성지 탈환, 200여 년간 지속된 종교 간 전쟁.’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로마 교황 우르반 2세가 ‘성지 회복’이라는 종교적 명분을 앞세워 성전(聖戰)을 촉구하자, 농민과 기사들이 결집해 붉은 십자 표시를 가슴에 달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갔다. 이후 십자군과 셀주크 투르크(이슬람) 간 오랜 접전이 이어졌지만, 결국 십자군의 성지 회복은 실패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의 차지가 됐다. 당시 이 십자군에 맞섰던 인물이 이집트의 술탄(이슬람교국의 군주) ‘살라딘(본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일곱 번의 종교재판 끝에 19세 꽃다운 나이의 소녀에게 화형선고가 내려졌다. 그의 죄목은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 ‘여제’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소녀, 잔 다르크는 이같이 안타깝게 스러져 갔다. ◆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소녀 1412년 프랑스 작은 마을의 소작농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는 16세 되던 해 “영국군을 물리치고, 왕세자 샤를을 왕위에 올리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를 계기로 샤를 왕세자에게 가서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백년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마음을 떠보는 이방원의 ‘하여가’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며,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정을 나타냈다. 고려 말, 정도전 등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하자 포은 정몽주(1337~1392)는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기회를 엿봐 그들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이를 먼저 알아챈 이방원에 의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1년 전 죽은 친구로부터 재산을 관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길선주(吉善宙, 1869~1935) 목사가 이같이 고백하자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하나둘 큰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회개의 물결은 ‘한국교회의 오순절’이라 불리는 평양대부흥을 일으켰고, 이후 전국으로 퍼지며 성령의 역사로 이어졌다. ◆성령의 역사 ‘평양대부흥’ 길선주 목사는
마더 테레사 수녀[천지일보=백지원 기자] 1988년 미국 하버드대 의과대학에서 재밌는 실험이 이뤄졌다. 마더 테레사의 일대기가 담긴 영화를 보기 전후의 면역항체 ‘Ig A’ 수치를 비교 분석하는 실험이었는데, 영화를 보기 전보다 본 후에 수치가 일제히 높게 나타났다. 이에 남을 돕는 봉사활동을 하거나 그러한 일을 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기능이 향상되는 효과를 ‘마더 테레사 효과(Teresa Effect)’라고 한다. 테레사 수녀는 섬김과 헌신, 사랑과 봉사를 실천했던 인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노벨 평화상으로 받은
복음 전파 위해 낯선 조선 땅으로 건너와[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선교의 문이 굳게 닫힌 조선 땅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 기도처럼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며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가 됐다. 기독교가 전파된 후 12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수많은 교회가 전국적으로 생겨났고, 외국으로 한국인 선교사를 파견하는 일도 많아졌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1846년 9월 16일, 그를 둘러싼 회자수(사형수의 목을 자르던 사람)들이 칼을 들고 차례로 그의 목을 내리쳤다. 8번째 칼날에서야 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그렇게 스물다섯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청년은 이 땅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렸다. 이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의 이야기다. 그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있었기에 이 땅에 천주교가 뿌리 내리고, 오늘날 수많은 천주교인이 탄생할 수 있었다. 가톨릭은 이 땅에 들어온 후, 100여 년 동안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의암 손병희 선생[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종교인으로, 민족 지도자로, 사상가로, 혁명가로….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가면 이 모든 삶을 감내해낸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그곳에 서 있는 손병희 선생은 한쪽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의연한 얼굴로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목숨 바쳐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대한민국을 후손들이 잘 지켜가고 있는지를 말이다.일제강점기 아래 독립의 갈망을 담아 ‘대한독립만세’를 목 놓아 외쳤던 1919년 3월 1일. 이 역사적인 날, 만세운동에 앞서 민족대표 29인(33인 중 4명 불참)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며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제가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습니다.” 73세의 고령임에도 서산대사(휴정, 1520~1604)는 승병을 모으고 통솔하며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다. 임진왜란 발발로 위태로워진 조선을 구하는 데 그의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임금의 요청에 승군을 일으킬 것을 자원하며 승려들의 마음을 모았다. 그렇게 모인 그의 제자 사명당 유정, 뇌묵 처영, 기허 영규, 중관 해안대사를 비롯
우리나라 천주교 최초 순교윤지충·권상연보다 4년 앞서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하느님을 믿는 신앙만 포기하면 풀어주겠다.” “나는 배교를 거부한다.” “네 몸이 성치 못할 것이며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신앙을 버릴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공동체 중심에 서 있던 김범우(金範禹, 세례명 토마스, 1751~1787)는 모진 고문과 형벌에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는 전주시 전동에서 정조 15년(1791)에 처형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으
가장 쉬운‘ 이치’가 삶의 해답… 형식적인 수행 의미 없어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스님, 대한민국을 어떻게 더 부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공무원들이 부정부패하지 말고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뭔가 특별한 해결책을 찾고 싶어 스님을 찾아간 권력가는 ‘어린애도 다 아는 말을 한다’며 욕을 하고 돌아갔다. 이 권력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스님은 퇴옹 성철(1912~1993) 큰스님이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며, 법명은 성철(性徹), 법호는 퇴옹(退翁)이다. 1912년 음력 2월 19일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으며 25세 되던
소외된 빈민의 처우 개선 위해‘ 벼룩’처럼 뛰어다녀[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나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하긴 해 도 듣고 나서는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일회성 자선에만 만족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 아베 피에르(1912.8.5~2007.1.22) 신부의 말이다. 그는 해마다 프랑스의 인기투표에서 자크 이브 쿠스토와 지네딘 지단 같은 국가적 영웅들과 함께 상위권을 차지하는 최고 유명인사였다. 그의 본명은 앙리 그루에 (HenriMarie Joseph G
신앙詩로 신앙고백“ 우리 삶이 신의 뜻으로 영원하기를”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동요 ‘송아지’다. 원래는 박목월 시인의 동시인데 음을 붙여서 동요로 제작돼 널리 알려졌다. 이 시에는 누가 봐도 인정하지 않을 수없는 이치를 담고 있다. 얼룩소의 송아지가 황소가 될 수는 없다. 청록파 시인으로 자연의 이치를 시에 담고자 했던 시인 박목월. 그는 일반 시뿐만 아니라 신앙시에서도 이러한 이치를 담으며 필력이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신앙심에 영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