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이맘때가 생각난다.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온 지구촌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듯 싶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평화의 물결로 뒤덮였고, 남과 북의 대결은 끝이 나고 평화는 그렇게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이 함께 일궈낸 ‘4.27 판문점 선언’, 두 정상이 상호 군사분계선을 넘었고, 이어 두 정상은 도보다리를 거닐며 회담이 진행되면서 남북 평화무드는 최고조로 달아올랐다.외신들은 한반도에 찾아온 평화무드를 자국에 속보로 긴급 타전하기에 바빴고, 국민들은 약 70년 만에 찾아온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는 창조주의 교훈이 있다. 즉, 세상만사에는 시종(始終, 시작과 끝)이 있고, 목적(目的)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는 시(時, 때)가 있다는 가르침이다.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다는 의미다. 이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는 진리다.그렇다 할지라도 하늘이 듣고 깨닫는 귀와 눈과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듣고 보고 깨닫지 못하니 마치 이성 없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먼저 ‘세인심폐
지금 대한민국에 위기가 찾아왔다면 그 이유가 뭘까. 원인 없는 결과는 없을 터이기 때문에 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진정 그리한다면 오늘의 위기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만약 그 원인을 찾지 못하거나 또 찾았다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고 옳은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자명하다.먼저 원론적 답부터 말한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개념이 없는 ‘무(無) 개념’의 나라다. 개념 대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영과 진영논리뿐이다. 그래서 요즘 ‘뿐이고’라는 노래가 유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그중에서도 정치권의 무 개념이다. 정
며칠 전 4.7재보선이 지나갔다.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에 불과했지만 분위기만큼은 대선과 총선에 버금갔다.이유인즉, 1년 후 치러질 제20대 대통령선거의 승리를 위한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정 안정과 정권연장이냐 정권심판 내지 탈환이냐를 놓고 정책은 사라지고 온갖 흑색선전과 의미 없는 난타전으로 치른 대 혈투였다.선거 결과는 정부와 여당의 대참패로 막을 내렸다. 특히 그 어떤 선거든 간발의 차이로 당락을 결정짓던 지난 선거와는 사뭇 다른 금번 선거결과에 관심이 간다.2018년 지방선거와 특히 지난해 치러진 총선에서
지구촌의 다툼과 분쟁과 전쟁은 우연일까. 지구촌엔 원래부터 이러했을까. 눈뜨면 싸우고 죽이고 죽는 이 참혹한 현실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다툼과 분쟁과 전쟁의 해결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전쟁과 평화’라는 상반된 두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전쟁이 있고 그 전쟁으로 인해 사망과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니 전쟁 대신 평화를 갈망한다는 의미가 내포 돼 있는 것이 아닐까.지구상엔 아마 다툼과 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게다.그처럼 다툼과 분쟁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일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은 없는데 왜 지구촌은 아비규환이며, 일촉즉발의
흔히들 ‘갈 데까지 갔다’라는 말과 ‘올 데까지 왔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을 때 하는 탄식이며, 이미 예견된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세상에선 이 같은 현상을 일컬어 말세(末世) 나아가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 한다. 즉, 모든 게 끝이 났다는 얘기가 된다.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말세’라는 말 말고는 다른 표현으론 현실을 대신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이 말세를 견인하는 풍조는 다름 아닌 불신(不信)풍조며, 이 불신으로 인해 세상은 혼돈과 암흑의 세상이 되고 만다. 또 이 불신을
지금 온 나라는 정권 말기를 맞아 다음 정권을 잡기 위해 벌써부터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다. 이를 위해 규정과 법칙이 존재하지만 불법을 해서라도 권력을 움켜쥐겠다는 속셈이 역력해 보인다. 우선 가까이는 대선의 전초전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가 그러하다.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해 사활을 거는 모양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얼마나 좋은 거기에 이 난리를 치는 걸까.갑자기 글 하나가 떠오른다.‘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즉, 십년 가는 권세 없고 열흘 내내 붉은 꽃이 없듯이 지금의 부귀영화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뜻이다. 당나라(측천무후)때 동방규의 시 ‘소군원의 호지무화초’에서 비롯돼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입에서 회자되곤 한다. 흔히 좋은 시절이 왔지만 상황과 처지가 녹록지만은 않을 때 쓰는 말이다.그러하나 분명한 것은 ‘봄이 왔다’는 사실에 필자는 초점을 맞추고 싶다.지금으로부터 38년 전 1984년 3월 14일이 찾아왔고, 세월이 지나 오늘에 이르렀지만 38년 전 그날이 갖는 의미를 아는 이가 있을까.거두절미하고 그날은 대 갑자년 ‘우주일주의 해’ 즉, 동방의 에덴이 회복되는
3.1절이 지나갔다. 102년 전 3월 1일, 그날의 함성이 역사적 민족적 종교적 인류사적으로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아는가. 왜 그날 선진들은 숭고한 피를 흘려야만 했는지 아는 이가 있는가.오늘날 형식적 요식행사와 함께 나타나는 위정자들의 주장과 발언은 오직 그날의 함성이 주는 메시지와는 사뭇 다른 정치적 수사(修辭)만 가득하니 각골통한(刻骨痛恨)이로다.그렇게 오늘의 3.1절 역시 이 시대 위정자들의 상투적 행사와 위선에 가려져 또 그렇게 잊혀져가고 있다.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이 3.1절이 한 주가 지난 지금 필자로 하여
지금 세상은 거짓말의 홍수가 나서 범람하고 있다. 세상엔 눈에 보이는 홍수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홍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홍수는 눈으로 식별이 가능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홍수는 눈으로 식별이 불가능하며 오직 마음의 눈 즉, 영안으로만이 가능하다.마지막 때인 오늘날이 노아 때 같다고 했다면 그것은 영안으로만이 식별이 가능한 영적 홍수를 두고 한 말일 게다.지금 세상은 거짓말과 그 거짓말의 위력으로 말미암아 홍수가 나서 입만 동동 떠다니며 간신히 연명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세상은 이러한 사실조차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역병이 지구촌을 강타한 지 어언 1년을 넘겼다. 현대문명 이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괴병(怪病)과의 싸움으로 지구촌은 당황했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은 물론 수많은 손실을 봐야 했다. 또 한편으로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많은 교훈과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코로나19의 역설이다.다시 말해 송구영신이라 하듯, 한 시대의 가고 오는 길목에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오늘을 살피고 내일을 준비하라는 하늘의 준엄한 명령은 아닐까.지구촌을 예고 없이 찾아온 코로나19
이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게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며, 생명보다 가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그래서 권고하는 바다.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봐야 할 책이 있다.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전서다. 꼭 그리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경서와 달리 성경은 신의 존재와 인간의 근본, 신과 인간과의 관계, 생로병사의 비밀과 해결 방법, 나아가 도래할 세상(來世)에 대해 주도면밀(교훈, 역사, 족보, 예언, 성취)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성경을 길(道)이라 하고 나
세상은 참 요지경속이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또 삼권(행정 입법 사법)이 분리되어 운영되는 자유민주공화국이다. 하지만 제 기능을 상실해 나라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다. 법과 기능은 욕심 앞에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고, 오직 거짓말을 ‘누가누가 잘하나’하는 거짓말 경연장으로 전락했다. 참과 진실은 힘을 잃고 다수가 위력으로 통치하는 말세현상이 나타난 것이다.그렇다면 3.1독립선언서에서 선진들이 왜 “위력(威力)의 시대가 가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온다”고 했는지, 또 ‘신천지(新天地)가 내(來)하도다’라고 했는지 작금에 나타
조선(朝鮮, 해 돋는 아침의 나라), 약 629년 전 이씨조선(1392년 7월 17일)이 개국을 맞는다. 고려(高麗)는 오랫동안 부패가 쌓여 적폐가 되어 종말을 맞는다. 그 부패와 적폐는 낡은 사상이 가져왔으며, 낡은 사상은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불교)의 결과니 곧 부패한 종교가 스스로 종말을 가져온 것이다.그리고 이성계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웠으니 이를 일컬어 흔히 역성혁명(易姓革命, 왕조가 바뀌는 일)이라 한다.개혁의 명분은 부패와 적폐를 척결하는 것이었고, 불교 대신 유교를 국교로 하는 숭
세월이 유수와 같다고 했던가. 신축(辛丑)년 새해가 밝아 온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첫 달이 다 지나가고 있다.금년은 소(牛)의 해다. 소는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우직함과 근면 성실함으로 주인의 농사일을 묵묵히 돕는 일꾼과 같은 상징성이 있다.이처럼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께서도 자신의 일을 돕는 데 있어 이 소(牛)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천우경전(天牛耕田)이란 말이 있는가 보다.그런데 우이독경(牛耳讀經)이란 말도 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일꾼도 있어 한 시대를 끝내야 하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이 시대 논객들이 자랑하듯 뽐내며 쓰는 글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적어도 필자는 이 세상의 아류(亞流, 독창성이 없이 뛰어난 것을 모방함)가 되고 싶지는 않다. 기왕지사(旣往之事) 아류가 될 바엔 낡고 쇠해 없어질 이 세상 헛된 것이 아닌 크고 높고 강하고 영원한 하늘의 진리를 전하는 아류가 되겠다.필자의 글은 필자의 생각과 뜻이 아닌 하늘이 이 시대를 위해 예비하고 택한 빛과 같은 천택지인이 목숨과 맞바꿔 싸워 이기고 받은 하늘의 계시(啓示)며 섭리며 생명이다(死卽生 生卽死). 따라서 이 글은 사람의
신축(辛丑)년 새해가 밝아왔지만 혼탁한 세상은 달라진 게 없고, 또 쉽사리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사람은 할 수 없지만 창조주께선 할 수 있다고 했다. 왜, 지은 것이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으니 지으신 만물을 자신의 법칙대로 운행하며 이뤄가고 있기 때문이다.새 아침 무슨 말을 할지라도 이 혼탁한 세상에 무슨 유익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 같아 오늘도 받은바 진리를 증거 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어떻게 당신 같이 무식한 자가 하늘의 높고 크고 강한 진
신축년(辛丑年) 새해, 섭리를 쫓아 어김없이 밝아왔다. 갓 보낸 지난 한 해, 지구촌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역병으로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버텨온 질긴 한 해였다. 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늘 희망과 새로운 다짐도 해봤지만 금년은 그럴 힘도 여유도 없다. 그래도 이겨내야 한다는 게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이처럼 곤고하고 곤란한 때 사람과 세상은 우리를 버릴지 몰라도 우리를 창조한 창조주께선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참된 희망과 구원이란 모두가 희망을 잃고 길을 잃고 의지할 곳 없이 방황하며 죽어갈 때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세상 끝날에나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하지만 이 같은 말세 현상에 대해 자각하고 문제의식을 갖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과연 있기는 할까. 성경에는 세상 끝날에는 노아 때와 롯 때와 같다고 했다. 노아 또는 롯 때 살아남은 자가 얼마나 될까 생각이나 해 봤는가. 홍수로 물에 잠겨 죽고 유황불에 타서 죽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고, 오늘이 그때와 같다고 했다면 한 번쯤 생각은 해 봐야 하지 않을까.창조주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금 지구촌은 그와 같은 현상이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지만 모두가 소경 귀머거리가 되어
경자년 한 해가 가고 신축년 또 새로운 한 해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다. 가고 오는 길목에 서 보니 회한(悔恨)인들 왜 없겠는가. 그 어느 때 보다 어지러웠던 한 해 얼른 지나가기를 바라는 이도 많으리라. 옛 성인들은 가고 오는 해를 보며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글귀를 남겼다.어찌 한 해의 오고 감을 말했겠는가. 한 해를 넘어 한 시대를 뜻하는 것이니, 지나간 한 시대의 부패하고 낡은 사상을 보냄이며 희망 가득한 새 시대의 개혁된 사상을 얼른 받아들인다는 깊은 의미가 담겼으리라.이는 섭리라는 말처럼, 맞이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