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 1919년 3월 1일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명 중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2시 반에는 탑골공원에서 5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선언식을 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같은 시각에 평양과 의주·원산 등지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은 대내외적 요인으로 일어났다. 대외적으로는 1918년 11월 3일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약소민족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전후 평화유지 조치를 합의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에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10년 8월 29일에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됐다. 이로써 1392년에 개국해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개칭한 조선왕조는 518년 만에 망했다. 순종은 일본 메이지 천황에 의해 창덕궁 이왕으로 책봉됐고, 고종은 이태왕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한일합병 조약 제8조에는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와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아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고 돼 있는데 일본은 한일병합조약에 대하여 각부 장관이 서명하고 메이지 천황의 재가를 받아 공포했다. 반면에 이완용은 순종의 재가를 받지 않고 직인만 찍어 합병을 공포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다시 나기 위해 처절하리만큼 몸부림치고 있다. 잉태한 여자가 아이를 낳기 직전 몸부림치는 해산의 고통과도 같다할 것이다. 다르게는 ‘호사다마’라 하던가. 분명 낡아지고 쇠하여지고 없어져야 할 구시대는 끝이 나고 희망의 새 시대가 잉태한 여자에게서 큰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나는 형국이다. 숱한 세월이 병신(丙申)년에 와서 막을 내리고 정유(丁酉)년을 기점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새 시대의 새벽을 알리고자 하는 걸까.아마 단일 사건을 통해 이렇게 많은 필진들의 논평이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어
광복절은 광복(光復)이라는 용어에서 보듯 희망과 기대가 함의된 날이다. 그러기에 이날은 정부 주관으로 치러지는 기념행사에서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우리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해준다. 이번 71주년 광복절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저력과 자긍심을 발휘하고 긍정의 힘을 되살려서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자”는 취지의 경축사를 천명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경축사 가운데 ‘건국 68주년’이라고 말한 대목을 꼬집어 왈가왈부하는 중이다.지금까지 박 대통령은 지나간 두 차례 광복절 경축사 내용에서 ‘건국 몇 주년’ 표현 없이
세계는 혼돈하고 혼탁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멍들어 가고 있다. 태고 이후 이처럼 어지럽고 부패하고 타락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이에서 어른까지, 지도자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미쳐가고 있다.다툼과 폭력, 테러와 파괴, 분쟁과 전쟁으로 얼룩진 이때에 한번쯤은 기억하고 싶은 인물이 있으니 바로 마하트마 간디다. 그는 비폭력 무저항 평화주의자다. 물론 그 정신은 우리나라 3.1운동의 3.1정신이 그 모태라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어찌됐든 그가 남긴 평화사상은 온 인류에 귀감이 되어 왔고, 특히 혼탁
4월 13일은 제20대 총선거일이기도 하지만 이 날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이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으로 나라주권을 빼앗기고 만주 등지로 떠나 독립운동을 하던 여러 애국단체 대표들이 1919년 이날, 중국 상하이(上海)에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대외에 선포했다. 우리 정부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인 이 날을 기념일로 정하고 1990년부터 정부주관으로 기념식 행사를 하고 있으니 올해 제97주년을 맞이하고 있다.상하이 외에도 중국 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여러 곳에 있다. 재정 조달, 군사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열악
3월이 오면 생명 희망 소망 같은 단어가 절로 생각난다. 특히 3월이 오면 만세소리와 함께 독립과 광복이라는 그날의 벅찬 감동이 오버랩 된다. 이는 97년 전 3월 1일 탑골(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독립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날의 함성은 26년 후(1945) 8.15 광복을 가져다 준 시금석이 됐다. 그날의 함성은 잠자고 있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과 광복의 의지를 일깨운 무저항 평화운동이었다. 또 그날의 함성은 민족지도자 33人으로부터 시작됐으나 우리는 민족지도자라 하기 이전에 종교지도자 33인(기독교 16, 천도교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한 체육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한 주말이었다. 광복이후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김성집 선생이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체육계는 ‘큰 별이 떨어졌다’며 큰 상실감에 빠졌고, 신문과 방송 등은 그의 삶을 되돌아보는 부고 기사를 내보냈다.그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2002년 별세)의 죽음이후 체육인 가운데 가장 많은 애도를 받았다. 해방 전후 파란만장한 선수 생활을 했고, 한국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틀을 잡는 데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다.그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바쁜 일상에서 큰마음을 먹고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 지역을 다니며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자료를 조사하면서 그들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음 날 32년만의 폭설로 인해 나의 발은 제주에 묶여 버렸다. 그리고 만나게 된 여성독립운동가 유족. 나는 여성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어머니에 대한 존경이 가득했던 유족의 눈빛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어머니는 나에게 세상을 보는 사랑의 눈을 남겨 주셨어요. 제가 지금 어린이집을 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입니다”라고 했던 고수선 여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영웅’의 사전적 해석은 이렇다. ‘사회의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거나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서 대중을 이끌었던 사람, 대중으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정리되어 있다. ‘보통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룬 사람’. 그들은 일반인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영웅’이라는 칭호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투철하고 강인한 의지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끊임없이 투쟁하고 도전한 활약상이 담겨있다. 특히 역사 속 영웅의 활약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 존재감이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부터 영웅이었을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나무는 겨울을 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다. 겨울 내내 앙상한 나무로 남는 이유, 그것은 나무의 줄기, 뿌리, 가지들은 추운 겨울을 견뎌낼 수 있지만 나뭇잎은 겨울을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멋진 가을 단풍을 즐길 기회를 가진다. 추운 겨울 내내 앙상한 가지로 남은 나무이지만, 그 생명력은 의심하지 않는다. 모진 추위를 겪고 봄이 되어서야 꽃을 피워 존재감을 드러내는 나무. 우리 역사에서 일제강점기도 추운겨울을 거쳐 봄을 향한 기다림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온갖 박해와 탄압 속에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붉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의 역사문제는 정치권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왜 이렇게 역사교육과 역사문제는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된 것일까?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연결되는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이자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근간이다. 그렇기에 모든 국가들은 역사문제에 민감하고 역사바로세우기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가까이에 있는 일본과 부딪치는 ‘독도문제’에서부터 일본과 중국의 ‘센카쿠 열도문제’, 더 나아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산가족찾기자료’ ‘난징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아리랑’ 노랫소리가 들리면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힘. 언제부터 불리어졌는지 모르지만 국내외에 전승되면서 민족적 동질성을 확인시켰던 노래. 그것은 한민족을 지탱해준 또 다른 힘의 선율이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행사가 개최되었다. 광복절을 전후로 영화, 연극, 시화전, 세미나, 플래시몹 등 ‘광복’과 ‘독립’을 주제로 행사가 진행되면서 온 국민은 ‘광복 문화’의 향기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지난 8월 26일 통영에서는 여성가족부 주최로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이 문구는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의 전면 탑문에 있는 글이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항일학생운동으로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를 주장했던 항일투쟁이었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1926년의 6.10만세운동 그리고 전국의 항일학생운동 전개에 발화점이 되었던 광주학생운동은 조선 여학생에 대한 희롱, 일제강압통치, 차별적 대우 등이 중첩된 현실 속에 폭발한 학생의 항거였다.1929년 10월 30일 광주를 출발했던 열차가 나주역에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는 문구처럼 예부터 스승과 제자는 어렵고도 소중한 관계에 있었다. 스승의 의연한 눈빛에 제자의 순수함은 스며들고, 제자의 의로운 기상에 스승은 응원의 눈빛을 보낼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스승과 제자의 참모습이었다. 하지만 근래의 ‘참교육’은 교육의 본질을 담아내기 어려운 현실에 봉착했고, 참교육의 단어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이기주의와 학벌주의, 입시현실을 쫒아가는 현 세태에 교권은 땅에 떨어졌고, 학생들은 배움의 소중함과 감사의 눈빛을 찾기보다 성과위주에 우선을 두고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그대는 3월 2일 이화학당 기숙사에 갔었는가?’ ‘그렇다’ ‘몇 사람이 모였는가?’‘박인덕, 황애시덕, 김마리아, 김하느론, 신체르뇨 등 도합 11명이었다’‘그대는 총독 정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정치에 대해서는 모른다’1919년 3월 18일. 경성지방법원 감사국에서 진행된 조선총독부 검사의 신문에 나혜석은 거침없는 분명한 어조로 답했다. 3월 2일, 나혜석은 이들과 여학생 3.1운동의 참여를 의논 했고, 4일에는 개성과 평양 등지에서 자금모금활동과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
“대한독립만세!” 96년 전, 온 강산을 뒤덮으며 울려 퍼졌던 소리다. 며칠 전 그날의 함성은 이 강산 위에서 곳곳마다 재연됐다. 국경일이 많지만 여느 국경일보다 올해의 3.1절은 모두에게 유독 관심을 갖게 하는 듯싶다. 때가 때인 만큼 금년은 96년 전 울려 퍼졌던 대한독립만세의 의미를 찾고 되새기려는 분위기가 역력해 보인다. 한마디로 1919년 3.1운동은 26년이 지나 1945년 8월 15일에 맞게 되는 일제 식민치하로부터의 해방과 광복을 얻고자 들불처럼 일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탑골공원에서 종교지도자 33인으로부터 시작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인간의 실존은 세계 내 존재이며, 그 존재의 기본성격은 역사성이다’라고 하이데거는 인간존재와 역사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 말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환경과 조건들을 떠나서 살 수 없고 인간의 삶이 곧 역사의 흐름이라는 의미이다. 내가 몸담은 나의 조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역사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자 관련 문제가 이슈화될 때 관심을 두게 되는 필수가 아닌 필요인 것 같다. 분단 70주년, 광복 70주년에 접어들며 ‘나는 나의 조국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일제강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가와 국민. 이 두 단어의 관계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가? 우리는 역사적 사례에서 그 해답을 엿본다. 일제침략에 끊임없이 저항했던 우리민족의 독립활동사례는 물론 그 이전의 의병운동, 국채보상운동, 3.1운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항일투쟁활동의 면면이 바로 그렇다. 이렇듯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넘어서는 본질적 가치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 전통사회를 살펴보면, 국가와 여성의 관계는 그리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1928년 1월 1일. 국내의 어려운 여건 속에 해외유학길에 올랐던 조선 여성들이 뉴욕에 모였다. 비록 조국을 떠나 미국유학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조국광복의 꿈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여학생들이었다. 앞서 이들은 1919년 일본 2.8독립선언에서 ‘조선은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던 재일유학생, 국내 3.1운동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던 학생, 그리고 근대교육을 수학했던 여성지식인이자 여성리더였다. 김마리아(회장), 황에스더(총무)를 비롯해 이선행, 우영빈, 안헬른, 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