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울려 퍼진 총소리는 시대의 권력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진 지난 10월 26일 시민이 쏜 총소리는 무책임한 정당정치의 폐해를 알리는 경종이며, 다가올 선거를 통해 심판할 것을 미리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 또한 지난 10월 26일 선거결과에 대해 그냥 보내기엔 왠지 석연치 않다. 다시 말해 벌써 지난 얘기가 됐다 할지라도 무슨 말이든 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날은 우리 선거 역사에 있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날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10월 31일 종교개혁 494주년을 맞아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회가 ‘목회자 윤리실천강령’을 선포했다. 기념사업회는 강령을 통해 “우리는 한국교회 갱신이 목회자 갱신으로부터 시작됨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회개를 통해 자기 갱신에 부단히 힘쓸 것을 다짐하며, 종교개혁 정신에 입각해 ‘목회자 윤리실천강령’을 선포하고 실천하고자 한다”고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교회 목회자가 변화돼야 한다는 요지다. 그들 스스로도 한국교회와 목회자가 부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가 대표회장으
아랍의 봄! 2010년 12월 튀니지의 한 소도시 시디부지드에서 벌어진 대졸청년 노점상의 분신자살 사건은 재스민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경찰단속에 항의하다 분신자살한 부아지지 청년의 분신은 극심한 생활고와 집권층의 부정부패 그리고 억압통치로부터 쌓여왔던 튀니지 국민들의 분노를 일거에 촉발케 한 촉매제가 되었고, 결국 오늘의 ‘아랍의 봄’을 이끌어 낸 진원지가 되었다. 지난 60~70년대 나아가 80년대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은 우리 국민 모두의 생각일 것이다. 한 청년의 분신은 나비가 되어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의 23년
지금 서방세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특히 유럽의 원조격인 이탈리아․그리스는 풍전등화(風前燈火) 그 자체다. 요즘 세계 뉴스의 탑은 그리스에 가 있다. 그리스는 총파업으로 굶주림과 대중교통의 마비 나아가 국가의 주요 기능마저 마비돼 가고 있다. 위기는 갈수록 심각해져 갈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더 큰 문제는 그리스 부도사태가 전 유럽으로 확산될 조짐이 크다는 데 있다. 사실상 유럽의 시대는 그 끝을 선고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제 세계가 의지할 곳은 아시아뿐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현실도 아직까진 그리 녹
우리나라는 참으로 아름답다.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에 태어나 살고 있는지는 눈으로 발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지역들이 저마다 사시사철 옷을 갈아입으며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아름다움! 그곳에서 나서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 아름다움과 함께 늘 같이해 온 얘기가 있고, 그 이야기 또한 아름답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때의 얘기로 끝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온갖 교훈을 남기기도 하고 때론 먼 훗날을 기약한 소망 섞인 이야기로 승화되어 전해지기도
선거철만 되면 상대방의 약점이나 비리를 폭로해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네거티브 전략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서로를 물어뜯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과연 나랏일을 맡겨도 괜찮을지 걱정이 될 정도다. 서로에게 그토록 문제가 많다면 어느 누가 당선이 되더라도 미덥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참으로 씁쓸한 선거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네거티브 전략은 비단 선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국정감사를 보더라도 감사 대상자의 약점과 비리만을 공격한다.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아니 인류 사회는 종교와 함께 흘러왔고 또 흘러갈 것이다. 이 지구촌엔 종교 없는 사회, 종교 없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가 살아야 사회와 나라가 산다’고 하며, 무엇보다 ‘종교언론이 살아야 종교가 산다’는 말까지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종교가 회복불능의 판정을 받고 이미 죽어 있으며, 나아가 종교언론마저 제구실을 못 하고 죽어 있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당연히 올바른 종교와 종교지도자가 없는 사회는 떠다니는 빙산과 같이 조각난 채 이리저리 유리방황하는 실정이 되고 말았으니 이상한 게 아니다. 이런
565돌을 맞는 한글날! 그 의미와 뜻을 기리기 위해 각종 문화행사가 전국에 걸쳐 펼쳐지고 있다. 한 방송사에서는 한글날을 기념하여 세종대왕께선 왜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게 됐으며, 과연 어떤 나라를 꿈꿨는지에 대해 풀어갈 ‘뿌리깊은 나무’를 방영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미국의 한 언어학자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가 만들어진 이날 즉,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자기 집에서 파티를 연다고까지 한다. 또한 이제 우리 한글은 우리만의 글이 아닌 전 인류의 글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 지난 20
몸에 좋은 도가니탕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영화 ‘도가니’가 이처럼 온 국민을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줄은 미처 몰랐다. 영화 ‘도가니’의 원작자 공지영 작가는 “양심의 법정에 사법부를 세우고 싶다”는 고백을 했다. 한편 현실 법정에서 불의와 싸워야 하는 공판 여검사는 일기장을 통해 “변호사들은 그 증인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데 내가 막을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본분을 다하는 것일 텐데…”라는 씁쓸한 독백을 했다. 이는 뿌리부터 부패한 작금의 세태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들이라 하겠다. 요즘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우리는 경제성장과 나라발전이란 구호 아래 모든 것을 잊은 채 여기까지 달려왔다. 얻는 것이 있었다면 더 귀하고 중한 것들이 잊히고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부정과 부패와 거짓과 왜곡은 어김없이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왔고, 오늘날 그 거짓은 이 세상의 주인이 돼 우리를 그 세계의 생각과 사상으로 사로잡아 길들이고 오염시켜 따르게 해왔다. 그나마 깨닫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 옛날 바벨론과 같은 화려하고 큰 성이 우리 앞에 있고,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철옹성(鐵甕城)이 돼 있었다. 이 같은 현실을 누가 조장했고 누가 만들었
지난 26~27일 양일간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신천지 말씀대성회가 열렸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이단으로 규정하며 핍박하고 있는 신천지가 말씀대성회를 열 때마다 한국교회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이들을 주시하고 있다. 온갖 핍박과 훼방 속에서도 신천지 측이 주최하는 말씀세미나가 열릴 때마다 세미나장은 많은 인파로 넘쳐난다. 더욱이 이번 세미나는 신천지예수교 이만희 총회장이 직접 강의에 나서 한국교계는 물론 세간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기성교회 교인들이 세미나에 참석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세미나 참석 후 이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한국인이 분노하고 있다” 어디에선가 본 신문기사의 헤드다. 대한민국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사회는 물론 종교까지 더 이상 갈 곳이 없이 바닥을 친 상태다.바닥을 치기까지는 부적합한 사연들이 많았겠지만 그중 작금의 저축은행 사태를 한 예로 들어보자. 이번 사태는 곪을 대로 곪아 있는 이 사회에 만연된 불법적 요소들이 때가 되어 터져 나오는 것 중 하나의 단면에 불과하다. 기존 9개 은행의 영업정지에다 금번 부산저축은행사건 이후 7개 은행을 추가하면 총 16개 은행이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는 경영주들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통일을 말한다. 우리의 소원은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다. 통계로 보면 92.6%의 국민이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 ‘통일세’까지 활발히 논의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통일 열기가 후끈 달아 있다. 북한 또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상 통일의 문제를 간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힘겨루기에 밀려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 속셈일 뿐, 통일 내지 경제협력을 위한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고 넌지시 제스처를 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통일은 오는 걸까.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유난히도 무덥고 지루했던 여름, 지겨우리만큼 태풍과 장마가 심했던 여름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저만치 물러가 버렸나 싶다. 자연의 섭리는 알게 때론 모르게 우리 곁에 잠시 머물렀다 곧 사라지곤 한다. 이처럼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와도 아는 자 없고 그냥 덧없이 그렇게 또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한 세상이 가고 한 세상이 왔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는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며, 왜 가야 하고 또 와야 하는가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왜 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야만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 몽드가 ‘한국인(Les Coreens)’이란 책을 펴낸 前 주한 프랑스 외교관 파스칼 다예즈-뷔르종을 소개하는 서평기사에서 “프랑스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한국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한국에 걸맞은 위상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는 기사가 내 눈길을 끌고 있다. 왜 저자는 한국을 몰이해 하는 나라에 대해 소개하면서 하필이면 이웃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을 들었을까. 한국은 과거의 한국이 아니다. 이 사실에 대해 우선은 우리 자신부터 우리에 대해 이해를 못 하고 있고, 나아가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이 참된
세상은 마냥 덧없이 흘러왔고 또 흘러가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듯싶다. 절대자의 계획하심이 있고, 또 그 계획을 이루어가는 경영하심이 있다는 진리가 살아 있기 때문일까. 근간에 있어졌던 이 나라 종교계의 시대적 참상(慘狀)이 낱낱이 드러나는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더욱더 그러한 생각이 든다. 장본인들은 그동안 썩고 곪은 종교현실을 얼마나 감추려 안간힘을 써 왔을까. 그러나 절대자의 계획 가운데는 드러나고 밝혀지지 않을 것이 없는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미리 예고했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인 줄을 깨달았으면 한다. 종교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이와 함께 어느덧 천지일보가 창간 2주년을 맞았다. 창간기념호를 낸 지가 엊그제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해가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참으로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2년 전 본지가 중도개혁을 표방하는 사회종교 종합일간지로 출발한다고 했을 때 기대보다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던 게 사실이다. 진보 아니면 보수라는 생각이 강한 언론계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중도개혁을 외쳤고, 더욱이 종교와 사회를 아우른다고 하니 창간 소식을 접한 이들마다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국제정치․경제 및 군사적 상황도가 급물살을 타며 개편되고 있는 때다. 요즘 한미 또는 한일 관계가 왠지 머쓱해진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진단해 볼 수 있겠다. 세계는 지금 힘의 균형 잡기가 한창 진행 중이며, 강대국에 의존하던 시대는 구시대적 발상으로 치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 의존은 멀어지고 있으며 상호 의존이며 협력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구촌 어디든 서로 나누고 협력하는 행보를 앞다퉈 나가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를 들어 보자면, 미국과 일본의 진의와 실체가 정확히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르기를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하나의 조직을 바꾸더라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또 한 나라의 정권을 바꾸기 위해선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요즘 중동의 카리스마,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며 리비아의 카다피가 몰락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우리는 지켜봐 왔다. 한 나라와 정권이 바꿔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가를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하물며 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운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거짓과 왜곡이 긴긴 세월
경술국치(庚戌國恥) 즉, 100년 하고도 한 해 전 우린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라를 빼앗겼다. 그리고 수많은 선진들의 피의 대가로 36년이 지나 8월 15일 기쁨의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오늘이 그 66번째 맞는 뜻깊은 광복절이다. 암울했던 그날들을 돌이켜 볼 때 광복은 참으로 가슴 벅찬 순간이 아닐 수 없었겠으나, 다른 한편으론 많은 숙제 또한 우리에게 남기고 있음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날의 함성과 함께 찾아온 광복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66년 전 광복의 교훈은 우리에게 참의미의 광복이 또다시 남아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