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고교 친구와의 오래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지난 6일 현충일에 육군 장교 출신의 고교 동창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구의 성묘를 다녀왔다는 소식을 SNS 단체 카톡방에 올렸기 때문이다. 매년 현충일 때면 빠지지 않고 성묘를 가는데, 올해에도 84세의 친구 노모와 만났다고 전했다. 친구가 군에서 순직한 것은 1981년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 때 강원도 철원 전방 고지에는 하얀 눈이 쌓였고, 매서운 강풍이 몰아쳤다. 최전방 사단 수색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친구는 비무장지대 GP 근처에서 눈길에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진(晋) 헌공의 부인 여희는 자기 아들 해제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태자 신생을 모함했다. “부친께서는 지난 밤 꿈에 그대의 생모인 제강(齊姜)을 만났다고 합니다. 빨리 제사를 올리십시오. 제사를 지낸 음식을 아버지께 드려야 하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충직하고 성실했던 태자는 곡옥(曲沃)에서 어머니의 제사에 사용했던 술과 고기를 헌공에게 바쳤다. 6일 후 헌공이 사냥터에서 돌아오자 여희는 태자가 가져온 음식에 독을 넣어 헌공에게 주었다. 헌공이 먹으려고 하자, 여희가 말렸다.“먼 곳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상이 없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의 폭로로 한국에서도 성폭력 고발운동인 #미투(Me 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서 검사의 폭로는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더는 침묵해선 안 된다는 용기를 주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피해자들이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여론도 확산되고 있다. 죄의식도 없이 성추행을 저지른 수많은 남성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과거를 폭로할까 싶어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성추행이 장례식장에서 그것도 장관까지 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거나 금호아시아나처럼 사내 공식 모임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한
실망을 넘어 충격을 금치 못할 일이 벌어졌다. 지난 17일 세월호 선체에서 수거된 진흙에서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그럼에도 해양수산부가 이를 지금까지 은폐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은 시신도 없이 지난 18일 장례식을 치렀다. 만약 해수부가 사실을 사실대로 밝혔다면 시신 없는 장례식 대신에 좀 더 추가 수색을 하자는 여론이 앞섰을 것이다. 아마 해수부는 이런 여론이 부담스러워서 유골 수습을 은폐하지 않았나 싶다. 한마디로 정무적인 이유로 세월호 가족들을 두 번 울린 꼴이다.
이창준 민속 칼럼니스트 조선시대 통치이념인 유교에 따른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예법(禮法)이다. 관혼상제는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를 말하는데 관례는 성인식, 혼례는 혼인식, 상례는 장례식, 제례는 제사를 말한다. 이 네 가지를 가례(家禮) 또는 통과의례(通過儀禮)라고도 한다.관혼상제는 고대 중국의 유교경전 ‘예기(禮記)’에서 가장 먼저 사용됐다. 이후 송나라 주희(朱熹)는 관혼상제를 생활을 규제하는 질서로 강조했다. 유교는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통
박춘태 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교수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이 행복하고, 삶에 행운이 따르기를 원한다. 그래서 종교로부터의 구원, 복권 구입, 또는 폭넓은 인간관계 형성 등을 통해 행복이 보장되고 행운이 나타나기를 원한다. 그런데 참된 행복을 얻고 행운이 따르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사심이 없어야 한다. 거액의 복권에 당첨됐던 사람이 얼마 안 돼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런가. 사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과 복권 당첨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은 탓이다.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데는 사심이 없어야 한다. 아울러 사심 없이 베푼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26년 2월 18일 이완용의 영결식 날, 장례 행렬은 화려했다. 이날 오후 4시에 이완용의 시신은 종로구 옥인동 집에서 영결식장인 용산으로 향했다. 맨 앞에는 기마 순사가 서고 그 뒤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 대훈위 후작 이공지구’라고 적힌 붉은 명정이 휘날렸다. 명정에 쓸 직함이 많아야 양반이라던 시절에 이완용의 유족들은 대한제국 총리대신을 비롯한 그 많은 직함을 다 물리치고 오로지 일본 천황이 준 벼슬만 명정에 쓴 것이다. 이완용은 죽어서도 일제에 충성한 것이다. 뼛속까지 친일파였다. 명정
윤주 ㈔효창원 7위선열 기념사업회 상임고문 “유방백세(遺芳百世), 빛나는 그 이름 후세에 길이 빛나리.”김구 선생이 효창공원 삼의사 묘소 묘단에 쓴 글이다. 해방 후 환국한 김구 선생은 당시 일본에 있는 박열 선생에게 일본 땅에서 순국한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발굴을 요청해 1946년 5월 15일 이분들의 유해를 봉환해 7월 6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했다.이때 김구 선생은 삼의사 묘역에 한 개의 가묘를 더 만들었다. 바로 안중근 의사의 묘다. 비록 아직까지 그 유해를 찾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그 유해를 찾길
최상현 주필 전설의 복서도 죽어서는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공동묘지의 좁디좁은 한 뼘 묘역에 묻혔다. 장례식은 법석을 이루었지만 묘지는 초라했다. 장군이 죽으나 대통령이 죽으나 그들을 위한 특권 묘역을 제공하지 않는 미국에서는 추호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미국 내외에서 온 10여만 애도 인파가 참여한 가운데 그가 난 고향 켄터키 루이빌의 공동묘지에 묻혀 영면(永眠)에 들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그의 운구 행렬이 지나는 길과 묘지에 향기로운 꽃을 뿌리기도 했다. 이로 보아 그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희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34년 전 하늘나라로 먼저 간 친구의 아버지가 죽었다. 지난주 금요일, 대학시절 학군단을 같이 했던 친한 동기생으로부터 친구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의사인 친구의 형이 노환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 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아침 아들의 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기생 전체에게 알렸던 것이다.저녁 동기생들과 문상을 한 뒤, 친구 형에게 장지에 대해 물었다. 아버지가 6.25 전쟁 때 3년간 군에 복무하면서 군 최고의 영예인 화랑무공훈장을 받아 국가유공자자격으로 동작
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라고 전해라’라는 유행어와 함께 인기몰이 중인 ‘백세 인생’이라는 노래는 2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작곡가 김종완씨가,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에 갔다가 유족들이 오열하는 모습을 보고 돌아와, 쓸쓸한 기분에 곡을 썼다고 한다.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당당하게 삶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흥겨운 가락에 담았다. 제목은 ‘저 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였다. 이 곡을 다른 음악인에게 주었고, 당시 그 밑에서 노래 공부를 하던 이애란씨가 그 노래를 알게 됐다. 그게 1995년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최상현 주필 한글 띄어쓰기와 마침표, 쉼표 찍기 등 기호 사용이 한글 창제 때부터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2년 허균에 의해 쓰인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도 그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들이 이루어진 것은 비로소 19세기 말 파란 눈의 미국인 한글학자 호머 헐버트에 의해서였다. 주시경과 함께 한글과 한글 맞춤법을 연구했었던 그는 아마도 그의 모국어인 영어의 띄어쓰기와 기호 사용을 한글에 적용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한글을 뛰어 넘어 우리의 고전음악에까지 미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직전 조선의 최대관심사는 명종의 외아들 순회(順懷) 세자의 부인 덕빈 윤씨의 장례식과 시호에 관한 문제였다. 윤씨는 11살에 과부가 됐으며, 세자의 4촌 선조가 뜻밖에 왕이 됐다. 윤씨는 29년 동안 창경궁에서 부처님을 섬기다가 40세에 죽었다. 선조는 왕후에 버금가는 장례를 치르라고 명했다. 논쟁이 시작됐다. 의논이래야 상복착용과 참석의 범위, 제사상에 올릴 소와 양의 선택과 같은 문제였다. 시호를 정하는 것도 중요했다. 망자에게 어울릴 두 글자를 정하기는 어려웠다. 유식한 신하들은 인(
박종윤 소설가 제나라 환공이 죽은 뒤 진(晋)나라 공자 중이 일행은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에서 푸대접을 받고 송나라에서 잠시 머물다가 그곳에서도 여의치 않자 다시 정나라로 갔으나 정나라 문공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부 숙점이 왕에게 간했다. 중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다음에 화근이 될 것이니 죽이라고 했으나 그 말도 듣지 않았다. 중이는 또 다시 남쪽의 큰 나라인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성왕은 의외로 큰 환대를 했다. 장군 자옥이 못마땅하여 당장 죽이라고 하자 성왕은 그들을 이해하라며 잘 타일렀다. 중이 일행이 초나라에 머문
박종윤 소설가 제나라 환공은 여자를 좋아해서 많은 애첩을 두었다. 부인 세 명은 아이를 낳지 못했으나 부인 대접을 받는 6명은 모두가 자식을 낳았다. 관중이 살아생전에 환공은 그와 상의하고 정희가 낳은 아들 소를 태자로 세우고 송나라 양공에게 그 뒤를 부탁했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제나라 신하인 역아는 진작부터 환공의 부인 중 장위희에게 충성을 보였다. 또한 항상 환관인 수조를 통해서 선물을 계속 바쳤기 때문에 환공의 환심도 사고 있었다. 그 역아가 환공을 마음을 바꾸게 해 장위희의 아들 무궤를 태자로 내세우도록 했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모욕을 받으면 분노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대의를 꿈꾸는 사람은 어지간한 분노 정도는 참아낸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가 그런 사람이었다.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이 몇 년도 지탱하지 못하고 흔들리자, 농민기의가 잇달아 폭발했다. 농민군은 성세가 강한 녹림(綠林)과 적미(赤眉)로 흡수되었다. 녹림군은 ‘하강병(下江兵)’과 ‘평림병(平林兵)’으로 양분되어 세력을 확장했다. 귀족과 호걸들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반왕망’의 기치를 들고 기의군에 가입했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연말로 접어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얘기가 자주 들린다. 불통 이미지는 주로 야권과 재야에서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야당 등의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KTX 자회사 설립, KBS 수신료 인상, 원자력 발전소 추가 건설 등을 추진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얼마 전 중앙 언론사 체육부장들과 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들과 오찬을 함께했다. 모 언론사 부장이 대화 중에 “박 대통령이 집무실에만 칩거해 청와대 참모와 비서진조차 잘 만나지 않고 대부분의 국정을 홀로 결정하는 것 같다”는 말이 눈길을
‘남아공 민주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장례식이 15일 거행됐다. 고향인 쿠누에서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엔 만델라의 유족을 포함해 영국 찰스 왕세자 등 수천 명의 조문객이 몰렸다고 한다. 만델라가 생전에 세계인으로부터 얼마나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인물인가를 보여준다. 평생을 남아공 민주화 투쟁에 헌신했던 그가 인류사회에 남긴 정신적 유산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918년 태생인 만델라는 남아공의 뿌리 깊은 흑백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항거하다 27년간 옥살이를 했다. 1990년
한병권 논설위원 # ‘이효리-이상순’ 커플은 부창부수(夫唱婦隨). 음악이 매개가 된 커플이다. 신랑이 기타를 치며 선창하면 에스라인 허리로 신랑에게 기댄 신부가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이들은 지금 음악처럼 감미롭고 아름다운 신혼생활에 푹 빠져 있다. 유럽 배낭여행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애월 바닷바람에 동화되고 한라산 숲 내음에 흠뻑 취하며 행복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최근 교통사고를 당한 유기견을 병원으로 옯겨 수술 등 치료를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유명인이라면 특급호텔 호화결혼식을 외면하기 힘들 수도 있을 텐데 이들은 제주도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11일 저녁 그를 문상할 때, 한국남자농구는 16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 본선에 올랐다. 안타까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벌어진 아시아 농구 선수권대회 3-4위전에서 대만을 물리치고 3위까지 주어지는 세계대회 본선 티켓을 따는 순간을 병원 장례식장에서 스마트폰 DMB 생중계를 통해 지켜본 대부분의 농구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추락한 한국농구를 재건하는 절호의 기회를 붙잡았다며 기대를 걸었다.김재웅(70) 전 여자농구대표팀 감독. 그는 마지막 암투병을 하면서 한국농구를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