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다. 싸움을 하더라도 상처와 앙금이 남지 않으며 쉽게 화해가 이뤄진다는 것을 뜻한다. 부부사이가 좋으면 ‘금슬(琴瑟)’이 좋다고 했다. 금은 거문고, 슬은 비파다.좋은 부부관계를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단어가 ‘금슬’이다. 금슬지락(琴瑟之樂 사이가 좋은 것), 금슬우지(琴瑟友之 금슬이 좋아 마치 친구처럼 지내는 것), 금슬상화(琴瑟相和 거문고와 비파소리가 화합하듯 사이가 좋음)라는 글이 있다. 부부가 함께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즐거워하는 정경을 ‘여고금슬(如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백제 불상의 미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통설이다. 작고하신 삼불 김원룡 전 서울대 교수는 서산마애삼존불을 가리켜 ‘백제의 미소’라고 명명했다.고대 일본인들의 정신적 고향은 백제를 지칭하는 ‘구다라(くだら)’였다. 아스카 시대 일본인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성지 부여를 흠모했다. 일본에서 전래된 금동불상을 본떠 이들도 불상을 제작했다. 그런데 일본 아스카, 하꾸오 시대 불상을 보면 상호가 우리 것만 못하다.그런데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아름다운 목조반가사유상을 가져가 특별하게 고류지(廣隆寺)에 모셨다. 그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조선 숙종 때 최고의 권력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맞짱 뜬 학자가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다. 우암이 오죽 미웠으면 미수를 가리켜 ‘독충(毒蟲)’이라고 까지 폄하했겠나. 그런데 미수는 한 번도 지지 않고 권력을 비판했다.미수는 독특한 글씨를 많이 남겼는데 고전체(古篆體)를 약간 흔들려 쓴 것이었다. 혹자는 미수의 글씨를 지칭해 ‘고문기자(古文奇字)’라고 평한다.필자는 오래전부터 혹 이런 유의 글씨가 중국에서도 유행하지 않았나 서법사전과 명인 수적을 열심히 찾아봤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고전체’를 즐겨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전통 유교사회에서 스승은 임금이나 부모처럼 최고 존경의 대상으로 그림자도 함부로 밟지 못했다.스승이 거느린 제자들을 가리켜 ‘문인(門人)’이라고 했다. 학문이 깊은 유학자들은 많은 문인을 거느렸다. 몇 안 되는 제자들을 가진 스승도 있었지만 명성을 얻으면 수백명 문인을 가진 이도 있었다.옛날 풍속에 ‘속수례(束脩禮)’란 것이 있었다. 처음 스승을 뵈러 갈 때 존경의 뜻으로 예물을 준비해 가는 것을 지칭한 것이다.왕세자도 사부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는 속수례를 치렀다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고대 백제 가요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작품이 ‘정읍사’다. 한 여인이 행상으로 집을 나선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언덕에 올라 기다리다 끝내 망부석이 됐다. 정읍사 가사를 보면 여인의 지아비에 대한 간절하고 절절한 사랑을 담고 있다.지난 1970년 프랑스 민속음악 경연대회에서 우리나라 고전 관현음악 수제천이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이 음악을 듣고 세계 음악 평론가들은 감탄했다. 슬프면서 정돈돼 있고 장중하면서도 섬세한 수제천은 그야말로 신비한 음악이었다. 이들은 하늘이 내린 ‘천상의 음악’이라고 엄지척을 세웠다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어느 나라이건 기억하고 싶은 역사가 있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역사가 있다. 잊고 싶은 역사는 무엇이고 기억해야 할 역사는 어떤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피로 지켜준 위대한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말했다.미국은 우리의 혈맹이다.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함께 지켜야 하는 든든한 우방이기도 하다. 6.25라는 참담한 비극을 통해 잿더미가 된 한국을 오늘날 번영을 이루게 한 힘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자유민주주의 체제였다.한때 우리 사회에선 용미(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고부터 뇌물이 생겼다. 부정한 관리는 뇌물을 받아야 일을 처리해주고 치부의 수단으로 삼았다. 기원전 고대 이집트 시대 때부터 이미 뇌물은 사회의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이집트 왕조는 뇌물을 ‘공정한 재판을 왜곡하는 선물’로 규정하고 행위를 단속했다는 기록이 있다.고대 중국에서는 뇌물을 ‘동취(銅臭)’라고 했다. 이는 꽤 유명한 말로 엽전을 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취에 대한 고사는 후한서 ‘최열전’이다.중국 후한 시대 말기 환관들이 권세를 잡고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국고가 바닥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신라 대찰 황룡사는 아쉽게도 고려 고종 시기 몽고 침입 때 불타 소실됐다. 사학자들은 이 사찰이 동양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이 사찰에는 신라 삼보(三寶) 중의 하나였던 금동 불상(장육상)과 목조9층탑이 있었는데 연기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황룡사 터에는 당시 초석과 불상을 안치했던 깨진 석조물이 남아있다. 경주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만약 이 사찰이 지금 그대로 있었다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 당국이 황룡사 탑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지지부진하다.대부분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축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충북 영동을 음악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악성 난계 박연 선생이 태어난 성지라서 이같이 부르고 있는 이유도 있지만 신라 향가 ‘양산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양산가는 신라 향가이며 민요 양산도는 조선 시대 노동요로 알려져 있다. 심천에서 양산까지 새 도로를 내면서 일꾼들이 흥얼거렸던 민요라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양산도에는 가사에 모란봉까지 삽입돼 지금은 경기도 민요가 됐다.신라 향가 양산가는 어떤 노래일까. 신라 왕족이었던 김흠운이 화랑도를 이끌고 양산에서 백제의 공격을 받고 전사한 것을 서라벌 사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도덕주의에 치중했던 조선시대에도 부녀자를 납치, 위해를 가하는 사건이 많았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이란 책을 보면 충격적이다. 16가지 희대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모두 연약한 여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세종 9년 여름에 여인이 죽은 채로 발견됐는데 시체는 온몸에 상처에다 몸의 중요 부분이 예리한 칼로 도려내져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었으며 화상을 입은 듯 처참했다. 임금은 이 사건을 듣고 분노해 어명을 내려 범인을 잡으라고 했다. 세종이 이 사건의 수사를 지휘한 셈이다. 의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젊은 태권도 선수들이 일정하게 벌이는 율동적인 퍼포먼스는 이제 세계인이 열광하는 장르가 됐다. 아메리카 갓 탈렌트에 나가도 입상을 경쟁하는 인기 종목이다.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는 국기 지정 5주년을 맞아 태권도인 1만 2000명이 참가해 태극1장 품세를 선보이는 페스티벌을 벌였다. 기네스 기록에 도전하는 행사였다고 한다.매주마다 정치 집회로 얼룩진 세종로 대로에 모처럼 멋진 장관이 펼쳐진 것 같다. 이를 내려다보시는 세종대왕 동상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도는 것만 같다.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 어느 정치집회도 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필자는 얼마 전 고서화를 수장하고 있는 한 지인으로부터 250여년 전 일본 에도(江戶)시대 남화(남종화, 일본에서는 이렇게 호칭함) 한 점 고증을 의뢰받은 바 있다.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려진 그림은 일본 후지산(富士山)과 오래된 사찰 풍경이었다.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조선시대 겸재 정선의 산수화처럼 우리 정서에 와 닿는 그림이었다. 작가는 이케노 타이가(池大雅, 1723~1776)로 일본 에도시대 작가 중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 중 두 점이 일본국보로 지정됐으며 많은 작품이 중요문화재로 등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198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충북도문화재위원이었을 때 청주시 북이면에 있는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 1586~1647) 후손들이 묘소를 도문화재로 지정해달라는 민원이 있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으로 척화론에 맞서 화의를 주장한 인물이다.인조가 피난한 남한산성 행궁에서 한편은 화의를 해야 한다고 하고 한편은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있었다. 항복문서를 작성한 최명길, 이를 어전에서 찢은 김상헌의 눈물겨운 얘기는 영화 남한산성에서 리얼하게 재현되기도 했다.최명길의 묘소는 당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고양특례시 고봉산에는 고대의 아름다운 사랑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5세기 초 고구려 안장왕과 개백현(지금의 행주산성 추정)에 살았던 토호의 딸 한주와의 사랑이 어린 곳이다. 두 사람의 얘기는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해상잡록이라는 책을 인용한 ‘조선상고사’에 기록되고 있다.안장왕과 미녀와의 사랑은 춘향전 얘기처럼 드라마틱하다. 이 기록의 원전은 삼국사기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으로 여기에는 간단하게 기록되고 있다.삼국사기 잡지(雜志) 지리(地里)편에 왕봉현(王逢縣)과 달을성현(達乙省縣)에 대한 설명 중에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춘향은 옥중에 갇혀 죽음 직전 삶을 끊으려 했다. 변학도의 마수에서 벗어나 한양 낭군에 대한 정절을 지키려면 극단적인 방법밖엔 없었다. 월매에 이끌려 춘향을 옥중에서 만난 이도령은 목숨만은 지키라고 당부한다.춘향이 서방님을 괄시 말라고 호소하는데 판소리로 들으면 눈물겹다. ‘…어머님 나 죽은 후에라도 원이나 없게 하여 주옵소서. 나 입던 비단 장옷 봉장 안에 들었으니 그 옷 팔아다가 한산세저 바꾸어서 물색 곱게 도포 짓고 백방사주 긴 치마를 되는대로 팔아다가 관, 망, 신발 사드리고 절병, 천은비녀, 밀화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세종대왕은 세자시절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운동 부족에다 평소 육식을 좋아한 탓에 살이 쪄 태종이 걱정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만년에 당뇨로 고생했는데 시력저하로 신하들의 얼굴마저 잘 알아보지 못했다. 세종 비 소헌왕후는 2살 연상이었다. 13세에 충녕대군(세종)과 혼인했으며 신랑은 11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세종은 누나 같은 소헌왕후에게 많이 의지했던 모양이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평생 금실이 좋았다고 하며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세종은 소헌왕후를 공손하다하여 공비(恭妃)라고 불렀는데 시아버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은 지진의 신이다. 포세이돈의 노여움에서 지진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포세이돈이 기분 나쁠 때마다 삼지창으로 땅을 치면 지진이 발생하며 인간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 지진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신의 노여움으로 지진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인구가 증가해 지구가 무거워지면 신들이 지진을 일으켜 사람들을 매몰시킨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대 야마토 설화는 땅속에 사는 큰 메기와 연관시키고 있다. 메기가 날뛰어서 대지진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과거 우리 역사에서도 많은 지진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한국의 애국적 도둑(?)이 대마도 한 절에서 훔쳐온 고려시대 금동보살좌상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처지에 있다. 대전 고등법원은 1심의 판결을 뒤집고 일본으로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지난번 부석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금동보살좌상 인도 청구 항소심에서 1심을 뒤집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것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330년 서주(서산의 고려시대 명칭)에 있는 부석사가 해당 불상을 제작했다는 사실관계는 인정할 수 있고, 왜구가 약탈해 불법 반출했다고 볼만한 증거도 있다. 그러나 당시 부석사가 지금의 부석사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대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불렸다. 이 말은 일본인들이 신라를 가리켜 ‘눈부신 금은의 나라’라고 부른 데서 기인했다는 말이 있다. 일본인들이 왕도 경주에 와서 무덤을 파기만 하면 나오는 것이 금, 은 제 유물이었으므로 이 같은 말을 지어낸 것이다. 일본 오사카 성덕태자 신사 박물관에 가면 뜻밖에 신라인들이 입고 다녔던 직금 비단 천을 구경할 수 있다. 신라 때 일본 왕실에 보낸 비단 옷이 천 조각으로 남은 것이다. 비단에 한 올 한 올 금사를 섞어 수를 놓은 것인데 요즈음 생산품보다도 더 선명하고 아름답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윤석열 대통령이 나경원 전 의원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시킨 처사는 또 지지층과 국민을 놀라게 했다. 나 전 의원이 사표를 냈는데 이런 강수를 썼다고 한다. 도대체 왜들 이런 무리수를 쓰나. 대통령에 대한 불경이니 술수이니 하는 막말이 쏟아지면서 그동안 가까스로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기대를 걸어온 국민의 실망이 대단한 것 같다. 지금 조선왕조시대로 착각하는가. 친윤이며 다혈질인 장제원 의원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앞에 나서 분노를 쏟아냈다. 나경원 전 의원을 향해 ‘대통령을 위하는 척하며 반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