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인 올해는 고종 승하 100주년이기도 하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1일 사적 제207호 남양주 홍릉(洪陵)에서 대한제국 고종황제 100주기 제향을 봉행한다. 조선왕릉 제향은 역대 왕과 왕비의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기신제)로, 지금까지 600여년을 이어온 왕실 제례 문화다. 홍릉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합장한 무덤이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던 까닭에 장안에서는 곧 독살설이 돌았다. 고종 붕어 소식을 듣고 상경한
3.1운동을 주도했던 종교계가 종단별로 기념사업 준비에 한창이다. 100년 전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지도자 33인은 모두 종교인이었다. 이를 주도한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만으로는 민족운동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 개신교, 천주교, 불교 지도자에게 참여를 권했다. 최종 구성은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으로 마무리됐다. 천주교는 참여하지 않았고, 개신교는 주최 측보다 많은 16명이나 참여했다. 이런 결과를 두고 개신교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그 배경에 교단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개신교는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2019년 새해가 밝았다. 1월 1일, 신년 해맞이를 하기 위해 서울 인근의 청계산에 올랐다. 군대시절 지인 부부들, ‘청계산을 사랑하는 모임(청사모)’ 회원들과 같이해서다. 청계산에서 가장 하늘을 넓게 볼 수 있는 8부 능선 부근의 ‘헬기장’에는 해가 뜨기 직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0세 안팎의 어린애부터 70세를 훨씬 넘긴 노년층까지 나이와 세대를 넘어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청사모 회장인 권태균 2002 한·일월드컵 한일공동응원단 단장(옛골토성 대표)은 미리 준비한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표현으론 모자란다. 국정농단을 딛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한해였다. 공평·정의가 아닌 권력과 꼼수와 차별이 난무했다. 수면 아래 있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참한 삶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성차별과 혐오도 극에 달했다. 3년 만에 들춘 위안부 합의는 결론이나 대안 없이 논란의 불씨만 키웠다. 분노한 민심이 하늘에 닿았는지 천재지변도 끊이지 않았다. 안전불감증은 여전했고 눈 가리고 아웅하기 식 관리도 드러났다. 사회를 계도하고 이끌어야 할 종교계의 부패도 극에 달했음이 확인됐다. 조계종
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3.1운동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삼천리 방방골골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전 민족구성원이 함께했다. 일제 통계만 보아도 3.1운동이 일어나고 3개월 동안 사망자가 7509명, 부상자가 1만 5961명, 체포된 사람이 4만 6948명에 이른다. 3.1운동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동안 역사교육에선 고종의 인산일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었고 울분에 찬 우리 민족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말한다. 3.1운동을 말할 때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한 민족대표 33인의 역할이 크게 부각돼 있다.
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육군무관학교는 대한제국의 육군 장교양성기관으로 1896년 1월에 설치됐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일시 문을 닫았다가, 대한제국 수립 이듬해인 1898년에 신식 군대의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다시 설치됐다. 이후 학교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후에도 남아 있다가 1909년 폐교됐다. 1905년에 입학한 김좌진 장군을 포함해 졸업생 수는 282명이었다.신흥무관학교는 만주 서간도에서 1910년 6월 10일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가, 1912년 통화현으로 이전한 뒤 1913년 건물을
8월 15일은 73주년을 맞는 광복절이다. 광복절이 갖는 의미는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나아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로 명문화 돼 있다.하지만 대한민국의 국호가 제정된 건국일을 놓고는 국론이 분열될 정도로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한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절 경축사를 통해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고려할 때, 올해는 건국 70주년이 아닌 99주년이 됨을 못 박았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에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호국보훈의 달에 우리가 되새겨봐야 할 역사적 사건이 있다. 나라를 다시 찾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윤봉길 의거다. 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회담에서 중국 장제스 총통이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우리의 독립을 약속받은 배경에는 윤봉길 의거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윤 의사가 이뤄낸 그 위업 뒤에는 어머니 김원상 여사가 있었다. 충남 홍성군 성북면 석정리에서 아버지 경주김씨 인제 선생과 어머니 천안전씨 사이에 1889년 12월 16일 장녀로 출생한 김 여사는
1919년 3.1운동 이후 안창호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99주년이 됐다. 임시정부는 망한 나라의 이름 ‘대한제국’에 다시 흥하자는 의지를 담아 ‘대한’에 국민의 나라 ‘민국’을 붙여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또 제국주의가 판을 치는 그 시절 ‘입헌공화제’를 채택했다. 이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명시한 현 헌법의 근간이 됐다.삼천만이 하나 된 ‘무혈 독립운동, 3.1운동’은 독립은 물론 인류평화와 공존의 사상을 담았다. 그 정신을 이어받은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이
정라곤 논설실장/시인‘역사 바로 세우기’는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펼쳐왔던 핵심 아이콘이었다. 사실과 다르게 왜곡돼 국민과 우리 사회에 잘못 알려진 나라 역사를 바로잡아 제대로 계승·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는 좋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정권을 잡은 권력층들의 보이지 않는 의도가 숨어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역사는 조선시대 등 왕조시대의 정사들이 아니라 일제로부터 광복돼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발생한 일들에 대한 과거사이다. 지금까지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통령이 나서서 강력 주장했는가 하면 집권여
기미년 3월 1일, 지난 3월 1일은 민족종교지도자 33인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울려 퍼진 지 99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그날의 함성은 다름 아닌 ‘대한독립만세’였다. 그날의 울림은 일제 식민치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을 넘어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먼저는 오늘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있게 했고, 궁극적으로는 훗날 부패한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알린 대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위력(威力)의 시대가 가고 도의(道義)의 시대 즉, 신천지(新天地)라는 종교의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을 알린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정라곤 논설실장/시인새해 들어 두 달이 지나는 동안 적폐청산이 이어지는 가운데 각종 사건사고 발생과 함께 정치권의 이합집산 등으로 우리 사회는 꽤나 시끄러웠다. 하기야 선거가 있는 해가 닥쳐왔으니 조용할 리가 없다. 각 당이 좋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 새 판을 짜고 사회적 이슈를 선점해 국민의 지지를 얻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난해 대선 때 정권을 잃고만 자유한국당에서는 거듭되는 국민여론 지지세 침체기를 어떻게 탈출하느냐 고민이 많았는데, 때마침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에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정라곤 논설실장/시인“이게 나라냐”라는 자조 섞인 말이 지난해부터 우리 주변에서 흘러나왔고 ‘나라다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국민 사이에서 자주 거론돼왔다. 지난 한해 우리 국가·사회에서 발생한 일들이 많았고, 외교안보·정치·경제·사회 등 국정의 다방면에서 편안한 날이 없다보니 모두의 걱정거리였다. 과연 ‘나라다운 나라’가 어떤 모습일까? 필자가 생각해봐도 선뜻 그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그렸음직한데, 지금 사정이 그렇지가 않고, 나라가 국민안전을
대한민국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28일 며칠간의 일정으로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했다. 방문 목적은 미국 상·하의원과 군사·외교 분야 지도자들을 만나 북핵 해결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북핵 대응을 위한 전술핵 재배치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틀림없다. 홍 대표는 도착 후 미국 외교협회가 주최한 간담회에서 “친북 좌파 세력 때문에 한미동맹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 북한의 위협보다 더 두려운 위기의 본질이다”라고 원색적 발언을 했다. 또 “과거 주한 미군 철수를 외치고 사드배치 반대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현재 한
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바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바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1908년 ‘소년’지에 게재된 육당(六堂)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의 첫 구절이다. 신시 또는 신체시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이 시는 낡은 것을 부수고 무너뜨리는 생명
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문재인 후보는 거대한 촛불민심의 힘으로 당선됐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민심에 충실한 정부가 돼야 하는 이유다. 촛불민심의 정신은 헌법과 법률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고 켜켜이 쌓인 각종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고 인간 존엄성을 짓밟는 제도와 관행을 없애는 것이다. 촛불항쟁은 동학농민혁명, 3.1운동, 4.19혁명, 광주항쟁, 6월 항쟁의 역사적 전통을 잇는 국민항쟁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불의한 권력을 용납하고 넘어간 적이 없다. 참고 참다가 기성정치가 해결하지 못하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20년 12월 29일, 이완용은 3.1운동 진압의 공로로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됐다. 당시 후작은 일본 안에서도 몇 명 안 될 정도로 권위가 높은 작위였다. 1922년에 이완용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1925년까지 4년간 서예부문 주임으로 활동했다. 이완용의 서예 실력은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조선 총독 데라우치로 부터 일본 천황의 귀에 들어갈 정도였다. 1913년 10월 11일 이완용은 다이쇼 천황으로부터 휘호를 써 보내라는 ‘천은’을 입는다. 이완용은 즉시 14자의 한시를 비단에 써
박상병 정치평론가 모처럼 만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꺼내본다. 우리 역사의 시원과 광활한 고구려 역사의 자긍심이 물씬 묻어나는 이 책에서 단재는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마음의 활동 상태의 기록이다.” 아와 비아의 투쟁! 그렇다면 지금의 탄핵정국에서 펼쳐지는 이 고단한 싸움도 결국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리고 이 투쟁의 결과물은 또 어떤 새로운 역사를 이어 갈 것인가.반민특위 해산, 천추의 한으로 남다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자주
1919년 3월 1일. 태극기의 물결이 대한민국을 하얗게 뒤덮었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민중의 뜨거운 심장은 고국산천을 붉게 물들였으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이들의 함성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온갖 불법과 무력으로 한반도를 짓밟았던 일제는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의 눈에서 결기를 느꼈을 것이다.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일제는 총과 칼로 대응했다. 평화를 위한 몸짓을 무력으로 무참히 짓이긴 그들은 한반도의 평화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까지 위협했다. 겉으로는 허울 좋게 동양의 평화를
서울지방보훈청 보상과 손효정1919년 3월 1일은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이다. 2017년 정유년, 벌써 올해로 98주년 삼일절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들의 애국정신에 저절로 숙연해진다.우리 선열들은 조국의 광복과 민족을 지켜내기 위해 2천만 동포가 하나 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태극기의 물결로 하나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장렬히 순국하셨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지방에서 국외 동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