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중국=장수경 기자] 2일 중국 선양시 황고구에 있는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1592∼1643) 무덤 ‘북릉(北陵)’이다. 풀이 자라지 않은 반원형 흰 모래무덤이며 무덤 정중앙에는 느릅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홍타이지는 청나라 초대 황제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천지일보 중국=장수경 기자] 1일 오후 중국 선양시 동북쪽으로 약 11㎞ 떨어진 언덕에 청나라 초대 황제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와 황후 예허나라씨(葉赫那拉氏)의 능인 ‘복릉(福陵)’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은 누르하치의 무덤으로서 마치 둥근 산 모양처럼 보인다.
[천지일보 중국=장수경 기자] 1일 오후 중국 선양시에 있는 청나라 초대 황제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와 황후 예허나라씨(葉赫那拉氏)의 능인 ‘복릉(福陵)’에서 누르하치 아들 홍타이지가 아버지 무덤에 제향드렸던 모습이 재연되고 있다. 관광객들이 재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복릉은 1629년에 건립돼 순치제 때인 1651년에 완공됐다. 복릉은 ‘동릉(東陵)’이라고도 부른다.
[천지일보 중국=장수경 기자] 30일 오전 중국 허투알라에 청나라 초대 황제 누르하치가 세운 첫 번째 도읍지 허투알라성이 당시 세워진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성 입구에는 ‘한(칸)왕궁(汗王宮)’이라고 적힌 비석이 비장하게 세워져 있다. 칸은 왕이라는 뜻이다.
[천지일보 중국=장수경 기자] 30일 오전 중국 허투알라에 있는 청나라 초대 황제 누르하치가 세운 첫 번째 도읍지 허투알라성이 당시 세워진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사진은 누르하치와 부인의 침궁이다.
[천지일보 중국=장수경 기자] 30일 오전 중국 허투알라에 있는 청나라 초대 황제 누르하치가 세운 첫 번째 도읍지 허투알라성이 당시 세워진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사진은 누르하치가 정사를 보던 ‘한궁대아문(汗宮大衙門)’으로서 군사적 작전을 짜거나 중요한 결정을 하던 곳이다.
[천지일보 중국=장수경 기자] 30일 오전 중국 허투알라에 청나라 초대 황제 누르하치가 세운 첫 번째 도읍지 허투알라성이 당시 세워진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1616년 누르하치는 이곳에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호칭을 ‘한(칸, 汗)’으로 부르게 하고 국호는 ‘후금(훗날 청나라)’으로 정했다. 성 건물 왼쪽은 누르하치가 정사를 보던 ‘한궁대아문(汗宮大衙門)’이며 오른쪽은 누르하치와 부인의 침궁이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명의 천계 5년(1625), 조야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양련(楊漣), 좌광두(左光斗), 위대중(魏大中), 원화중(袁化中), 주조서(周朝瑞), 고대장(顧大章) 등 ‘6군자’가 뇌물을 받았다는 고발이 접수됐다. 6명은 차례대로 하옥됐다. 양련과 좌광두는 옥사했다. 죽을 때 양련의 몸에는 한 점의 살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흙을 담은 자루로 시신을 눌러 놓았고, 양쪽 귀에는 못이 박혀 있었다. 그는 피가 묻은 옷을 입은 채로 관 속에 들어갔다. 좌광두의 시신은 썩어서 악취가 진동했으며 벌레가 기어 다녔고
인터뷰|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사후삼국, 고려시대 거치면서 한자의 소리 읽게 돼대한민국, 한양, 한강의 ‘한’은 우리말[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탄항리(灘項里)는 ‘여울목’, 이포리(梨浦里)는 ‘배개’라 불렀죠. 우리말 땅이름, 참 아름답죠?”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사는 “우리말 땅이름을 부르는 게 당연하지만, 다른 문명권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했다.처음에는 한자의 뜻을 땄을 경우 뜻으로, 소리를 땄을 경우 소리로 읽었지만 후삼국과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한자의 뜻을 땄든 소리를 땄든 표기된 한자의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대부분 만주족의 청이 한족의 명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지만, 명의 숨통은 농민반란을 주도한 이자성(李自成)이 끊었다.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자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매산(煤山)으로 올라가 자살했다. 시원찮은 황제였지만 반란군에게 치욕은 당하지는 않았다. 훗날 청왕조에 반항하던 한족은 그의 죽음을 대단한 것으로 묘사했다. 이자성은 국호를 순(順)로 정하고 칭제했다. 훗날 중국공산당은 이자성을 위대한 농민혁명가로 받들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북경 곳곳에 있던 대신들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창고에서 진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누르하치는 평생 수많은 전투에서 거의 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에서 명의 원숭환(袁崇煥)에게 참패했다. 1622년, 누르하치는 명의 요동경략 웅정필(熊廷弼)과 요동순무 왕화정(王化貞)을 대파하고 광령(廣寧)을 탈취했다. 웅정필과 왕화정은 산해관으로 후퇴했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참수됐다. 명조정은 손승종(孫承宗)을 요동경략으로 임명했다. 손승종은 원숭환을 등용해 영원성을 수축하여 전쟁준비를 완료했다. 누르하치는 명의 경략 따위는 우습게 여겼지만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4년 동안 그는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여유창해미귀인(旅遊滄海未歸人),사의고정망북신(徙倚高亭望北宸).청초만당가절과(靑草滿塘佳節過),도화영락전잔춘(桃花零落殿殘春).너른 세상 떠돌다가 돌아가지 못하고,높은 정자에 기대어 북쪽 대궐을 바라본다.푸른 풀 제방에 가득하니 좋은 시절은 가고,복사꽃 떨어지며 봄날은 간다.사명대사께서 무려 7년을 끈 임진왜란을 마무리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우에노(上野)의 죽림원(竹林院) 벽에 적었다는 시이다. 음력 3월이었으니 남국은 이미 초여름이었으리라. 우에노는 도요토미정권을 무너뜨린 도쿠가와정권이 새로운 본거지로 건설한
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박 선생! 지난 목요일에 다렌을 거쳐 선양(沈阳)에 왔습니다. 그동안 중국여행은 몇 차례 다녀보았지만 동북지방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중국을 여행할 때마다 문득문득 느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 속도가 빠르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여행 다니는 곳이 공항이 있거나 고도시 또는 볼거리가 풍성한 이름난 관광지 등 중국정부가 중점적으로 발전을 시도하고 있는 지역이라서 그런가봅니다. 그렇다고 해도 땅이 넓고 인구 또한 많다보니 현지에서 부딪혀가며 체감되는 것은 대국으로서 중국의 면모이니 돌아다녀 볼수록 새삼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4세기 말까지 청황실의 시조 멍거테무르가 이끌었던 오도리(斡朵里)는 두만강 하류 훈춘과 중류 회령 일대에 살면서 조선에 부속된 작은 부락에 불과했다. 1423년, 명을 도와 타타르를 정벌하러 갔다가 타타르의 보복이 무서워 고토인 두만강 중류로 돌아올 때 그가 거느린 인구는 6500명에 불과했다. 조선과 명은 이들을 ‘야인’이라 불렀다. 건주여진은 내분과 외침에 시달렸다. 설상가상 조선이 두만강 유역에 6진을 개척하자, 건주좌위는 압록강의 지류 파저강(婆猪江) 유역으로 이동해 건주위의 오랑캐(兀良哈)와 합류했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645년, 북경을 점령한 청왕조의 통치자는 한족의 천하를 오랫동안의 군사적, 정치적 노력을 통해 빼앗았다고 생각했다. 청왕조의 위업은 1680년대 초, 강희제(康熙帝)가 삼번(三藩)을 평정하고, 대만의 정(鄭)씨까지 무너뜨린 시점이 정점이었다. 만주족의 정권이 공고해지기까지는 명의 북쪽 국경을 위협하던 준비단계에서, 입관 이후 명의 구체제를 활용하고 조정하는 시험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한족과 만족을 융합하는 통치방식을 절묘하게 적용한 정치체제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통치방식에 따라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청의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게르만 민족은 삼림에서 뛰쳐나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후 독특한 사유와 행위 방식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전쟁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는 오랫동안 원시적인 삼림에서 생활한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민족마다 유년기에 대자연으로부터 생존방법을 배웠다. 게르만은 울창한 삼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했다. 삼림의 세계에서는 약육강식이 자연법칙이다. 이러한 대자연의 잔혹함이 독일 민족의 영혼에 깊이 각인되었다. 농경, 유목, 해양민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의식이다. 근현대사에서 게르만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독도를 비롯한 섬 때문에 동북아시아가 시끄럽다. 그러나 작은 섬 하나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모문룡(毛文龍, ?~1629)은 지금의 항주인 인화(仁和) 출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요동에서 근무했다. 1622년 1월, 요동이 후금에게 무너지자 해로로 돌아서 진강을 수비하던 적장을 죽이는 무공을 세웠지만, 오만한 성격 때문에 상관과 마찰이 잦았다. 왕화정의 추천으로 좌도독으로 승진하여 압록강 하구 피도(皮島)에 주둔했다. 피도는 명의 전략기지인 내주와 등주에서는 멀리 떨어진 황폐한 섬이었다. 남쪽은
우리가 말하는 간도는 현재 우리나라 국경으로부터 하얼빈을 훨씬 넘어선 흑룡강 일대까지를 말한다.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대한제국을 침략한 후 고종황제가 국새도 누르지 않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그런 다음 수많은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간도를 관리하기 위해 파출소까지 설치했다. 그때까지도 간도는 대한제국 땅이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에 만주의 철도부설권과 탄광개발 조건으로 간도조약을 체결해 저희 마음대로 우리 땅을 주고받았다. 주권국을 제외한 채 제3국끼리 체결한 영토의 양도는 무효라고 국제법에 명시되어 있다.
고려 예종 10년(1115년)의 기록에 의하면, 생여진(生女眞) 아골타가 황제라 일컫고 금나라를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에 우리 평주(平州)에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으로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에 거주했으며 이가 금의 시조라 하였고, 또는 평주 승 김행의 아들 극기가 여진 아지고촌에 들어가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고을(古乙)이고 태사가 되었다. 고을이 낳은 아들 활라(活羅)도 태사를 이었다. 활라는 많은 아들을 두어 장자가 핵발리고 계자(季子)를 영가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이어서 중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장자 오야속이 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