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사지~이정표~국사당~전망바위~순결바위~황매산성 터~모산재 정상~무지개터~돛대바위~영암사지모산재가 명당이긴 명당인가 보다. 예로부터 제일의 명당으로 알려진 무지개터도, 또한 고려 말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들러 조선 창업을 기도하러 온 국사당도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가야산이나 황매산이 아닌 일개 고개가 명당이라니 ‘작은 고추가 맵다’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각설하고 길 따라 오르는데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경사가 급하다. 쉴 틈 없이 오르다보면 아주 작은 석굴이 보인다. 바로 국사당이다.이글루처럼 돌을 쌓
세 번째였다. 싱그러운 초록이 지천으로 깔리는 오뉴월 가야산을 오르기 위해 지난해에만 두 번이나 방문했다. 당시 만물상 코스와 해인사 코스를 각각 오르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눈과 마음은 황송했다. 자연이 이토록 위엄스러웠던가. 게다가 들른 식당마다 찬(餐)이 글쓴이의 입에 꼭 맞아 합천에 대한 인상은 좋기만 했다. 한 고장을 기억에 담는 경험은 생애 처음이었다. 그리고 10개월 뒤 아주 이른 봄에 찾은 합천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모산재와 영암사지, 묵와고가를 찾았다.◆고개를 얕보지 말라‘재’에 단순히 고개라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유턴금지표지판에 ‘윤회금지(NO SAMSARA)’란 글씨가 어우러져 있다. 원래 존재하는 것인 양 자리를 지키는 ‘엉뚱한’ 표지판이 실소를 자아내지만 이내 ‘윤회를 금한다’는 짧은 문자와 그림이 주는 압도적인 뜻에 ‘나’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언뜻 작가가 불자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친(親) 불교적이다. 작가는 거의 매일 명상에 잠기고 초기경전을 열독하면서 자아성찰에 매진한다.내면에 집중하는 삶을 십수 년간 살아온 까닭인지 얼굴엔 온화한 향이 가득하다. 상대방에게도 평온한 향을 전하는 그는 끊임없이 부처의 가르침에
언제부터일까. 1990년대 말 남성 듀오 클론이 ‘쿵따리 샤바라’로 대만에서 큰 인기를 얻은 이후 H.O.T., 젝스키스, 신화 등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 대중음악계에 한류바람이 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제이팝(J-POP, 일본 대중음악) 시장이 미국 다음으로 컸기 때문에 갑작스레 수직 상승한 한국 대중음악-당시 ‘케이팝’이란 단어는 생소했다-의 인기는 얼떨떨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해외진출은 곧 불어닥칠 음반시장의 불황을 극복하는 방책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대형기획사들 중심으로 해외진출을 염두에 둔 가수들이 양성됐다.
오천원·오만원권에 철학을 담다이종상 교수는 화폐 화가로 알려졌다. 오천원·오만원권의 인물화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됐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화폐 그림 작업에 두 번이나 참여한 작가다. 화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기준에 합격했다는 뜻이다.보통 연륜이 있는 화가가 그리며, 투기나 부채 등의 금전적인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 돈이 통용된 이후에도 작가는 돈과 관련해 청렴해야 한다. 돈과 작가의 이미지가 평생 함께하기 때문에 지폐가 대중의 손에 들어간 이후 작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화폐는 모두 폐기해야 한다.이 교
통섭이야말로 걸작이다역사와 만난 작품, 127만여 세계인의 마음속으로이종상 교수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끊임없이 그 작품에 빠져든다. 그림 대상과 물아일체가 되어야지만 작품이 오롯이 가치를 발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그다. 오죽하면 원효대사를 그리기 위해 기신론까지 공부했을까. 이를 인연으로 급기야 동국대학교 동양철학과에 학사로 편입한 뒤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현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근원과 원리를 알아내는 습관이 배어있는 이 교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미시적인 것은 거시적인 것과 하나입니다. 마치 나무 한 그루가 숲의 일부라는
어느 작업도 소홀히 임하지 않는다. 작업을 끝내면 녹초가 돼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개월 고생할 것을 알지만 허투루 손을 놀리지 않는다. 작품마다 대작(大作)으로 일컬어지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붓을 잡은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그는 늘 초심으로 임한다. 그렇게 나온 산물(産物)은 꼭 화백과 닮았다. 육십여 년 전 ‘마음과 그림은 일치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여전히 마음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노화백.대중에게 화폐 화가로 잘 알려진 일랑 이종상(76) 서울대 명예교수다.젊은 시절 이종상 교수는 옛 진경산수화를 보며 궁금증이 생
글마루」마루대문 - 이야기가 있는 유적지합천 영암사지 Ⅰ 비움의 미학을 품다 곳곳에 솟은 산과 산 사이의 좁은 계곡. 陜川(합천)이 주는 의미와 땅 모양새가 꼭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면적이 좁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래봬도 경남에서 가장 넓고 서울보다 1.6배 큰 합천(983.47㎢)이다. 어디 면적만 클쏘냐. 해인사와 더불어 영암사터 등을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합천은 경주와 함께 잘 나가던 고장이었던 게 틀림없다. 천 년 전의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한 합천으로 떠났다.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빈터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란 생각이
글마루」마루대문 - 이야기가 있는 산합천 모산재 Ⅰ “날 쉬이 보지 마시오” 곳곳에 솟은 산과 산 사이의 좁은 계곡. 陜川(합천)이 주는 의미와 땅 모양새가 꼭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면적이 좁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래봬도 경남에서 가장 넓고 서울보다 1.6배 큰 합천(983.47㎢)이다. 어디 면적만 클쏘냐. 해인사와 더불어 영암사터 등을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합천은 경주와 함께 잘 나가던 고장이었던 게 틀림없다. 천 년 전의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한 합천으로 떠났다.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철쭉으로 유명한 황매산 남쪽 자락에 위치한
「글마루」마루대문 - 이야기가 있는 고택 합천 묵와고가Ⅰ 여유로운 침묵을 즐기다 곳곳에 솟은 산과 산 사이의 좁은 계곡. 陜川(합천)이 주는 의미와 땅 모양새가 꼭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면적이 좁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래봬도 경남에서 가장 넓고 서울보다 1.6배 큰 합천(983.47㎢)이다. 어디 면적만 클쏘냐. 해인사와 더불어 영암사터 등을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합천은 경주와 함께 잘 나가던 고장이었던 게 틀림없다. 천 년 전의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한 합천으로 떠났다.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자목련 잎이 움트기 전이다. 아직 가시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모두가 부러워하는 바위가 있다. 산꼭대기의 터줏대감 고래바위는 바다의 대왕고래보다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런 고래바위에게 바다 넘어 온 새 한 마리는 새로운 문화를 알려줬다. “바다에 가면 꼭 너처럼 생긴 고래가 있어”라고. 그 이후 고래바위는 바다엘 가고 싶었다. 자신과 똑 닮은 고래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만 굴뚝같을 뿐 어떻게 가야할지 몰랐다. 그는 산꼭대기 위에서 움직일 수 없는 바위이기 때문이다. ‘고래바위’는 큰 바위가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려 꿈이 이뤄지는 노정을 담았다. 욕심 부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이탈리아 작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의 고철 이야기가 한국 독자들을 찾았다. 연회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우리는 한때, 삽이었고 펜치였고 톱이었고…’라는 문장이 덩그러니 놓여있어 ‘과연 무슨 이야기일까’란 호기심을 자극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기발한 고철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작가의 감각적인 해학과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오랫동안 간직해 온 고철 덩어리를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시켰다. 환상 속에 빠지는 즐거움, 조각품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관찰하는 즐거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즐거움을 독자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우리나라 근현대사만큼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낸 나라는 극히 드물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동족상쟁, 산업화와 민주화 등 다른 나라에선 일어나지 않거나 또는 통상 100~200여 년 걸린 것을 우린 100년도 채 안 되어 모든 걸 경험했다. 그야말로 체제도 시대도 ‘빨리빨리’ 변했다. 수문장 교대식을 구경하러 나섰던 그 자리가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과 청국 군대가 쫓고 쫓기던 자리임을, 공원 어귀에 장식처럼 서 있는 동상의 주인공이 백여 년 전 온 국민을 애국심에 불타게 만든 인물임을, 연인들이 함께 걸어가는 낭만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고려사는 낯설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877~943)과 공민왕(1330~1374), 공민왕과 함께한 최영(1316~1388) 장군, 정몽주(1337~1392)가 가장 알려졌을 뿐 그 외 고려사와 인물은 비밀스럽다. 이렇게 베일에 싸인 고려사 가운데 ‘리모컨’으로 통치한 충선왕의 삶이 세밀하게 공개됐다. 바로 고려사를 대중에게 소개해 온 이승한 박사의 ‘혼혈왕, 충선왕’을 통해서다. 충선왕(1275~1325)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1931~2005) 씨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이구 황세손은 황
「글마루」마루대문 - 군자의 향기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고산 윤선도의 발자취Ⅶ ‘진도에서 해남으로 가는 길’ ‘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
「글마루」마루대문 - 군자의 향기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고산 윤선도의 발자취Ⅵ ‘진도 사적비’‘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의 간척지다.
「글마루」마루대문 - 군자의 향기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고산 윤선도의 발자취Ⅴ ‘세연지와 옥소대’‘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의 간척지
「글마루」마루대문 - 군자의 향기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고산 윤선도의 발자취Ⅳ ‘고산 윤선도 묘소와 시제’‘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
「글마루」마루대문 - 군자의 향기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고산 윤선도의 발자취Ⅲ ‘공룡알 해변과 보죽산’‘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의
「글마루」마루대문 - 군자의 향기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고산 윤선도의 발자취Ⅱ ‘낙서재와 동천석실’‘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의 간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