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원, 종단 정상화 위한 ‘제2 정화운동’ 선포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조계종과 갈등을 빚고 있는 선학원이 “비리에 연루된 16명의 권승들은 즉각 조계종을 떠나라”고 주장하며 ‘제2 정화운동’을 선언했다.선학원은 최근 서울 안국동 선학원 회의실에서 임시 이사회를 열고 ‘제2 정화운동 선언문’을 채택, 사부대중의 동참을 호소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현재의 조계종은 총무원장 자승 등 부정부패 승려들로 인해 한국불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며 현 집행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선학원은 조계종의 모태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
전국비구니회 파행적 운영 비판… 임시총회 소집 촉구[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조계종 전국비구니회가 내부 문제로 심각한 내홍에 휩싸인 가운데 비구니 교수·강사 스님들이 운영위원장 계환스님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34명의 비구니 교수·강사 스님들은 22일 성명을 내고 열린비구니모임에 대해 지지 의사를 피력하고, 전국비구니회에 운영위원장 계환스님 사퇴와 임시총회 소집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전국비구니회의 파행적 운영을 심려하는 교수·강사모임’으로 모인 이 스님들은 “그동안 제10대 비구니회 집행부가 과연 6000여 명의 비구니를 대표하는
천도교 151주년 지일기념일… 최시형신사의 뜻 기리는 기념식수[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천도교가 제151주년 지일기념일을 맞아 교조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동학혁명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교단중흥과 인류의 공생·공영에 이바지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천도교중앙총부는 14일 서울 중구 중앙대교당에서 제151주년 지일기념식을 봉행했다. 지일기념은 천도교 제1세 교조이신 수운대신사(최제우)가 천도교 제2세 교조인 해월신사(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한 날로서 천도교 4대 경축일 중 하나다.천도교 박남수 교령은 기념사에서 “해월 최시형 신사는 고난의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천태종 부산 삼광사(주지 무원스님)의 법화삼매당 법희원의 ‘석조여래좌상’이 부산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최근 문화재전체위원회를 진행한 부산시는 삼광사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한 5점을 시 지정 문화재로 추가 지정했다. 지정된 문화재들에는 범어사 원효암 아미타삼존도, 부산대박물관이 보관 중인 아미타내영도와 칠성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다.삼광사의 석조여래좌상은 전체 높이가 104㎝에 달하는 큰 불상으로 넓은 어깨와 높은 무릎으로 안정감 있는 비례가 인상적이다. 수인 등 전체적인 조형 방식이 조선 후기 여래상의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팔공총림 동화사 주지에 불교중앙박물관장 덕문스님이 전격 임명됐다.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1일 오전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집무실에서 팔공총림 동화사 주지 덕문스님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와 함께 조계사 주지 원명스님에게도 임명장을 전달했다.동화사 주지 덕문스님은 오래전 진제스님에게서 ‘능도’라는 법호를 받은 참회제자로 오는 5월 25일부터 임기에 들어간다.동화사는 방장인 진제스님이 차기 주지로 종정 예경실장(비서실장)인 효광스님을 지명하자 현 주지인 성문스님이 반발하며 큰 갈등을 빚었다. 진제
[천지일보=이길상 객원기자] 전국 직장 직능 신행 단체인 서울메트로 법우회(회장 이종성)에서는 오는 10일(화) 서울메트로 교육문화회관 3층 대강당에서 ‘시민고객과 함께하는 행복바라미 음악회’를 개최한다.이 행사는 서울메트로의 안전운행과 발전을 기원하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고객과 하나가 되는 소통의 장을 만들고자 기획됐다.서울메트로 법우회는 “흥겨움과 풍성함이 함께할 이번 음악회는 시민 고객과 함께하는 서울메트로 이미지 제고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불국정토를 구현하는 축제의 장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나는 6.25 전쟁에 나갔다. 그 당시 전쟁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나가 싸웠는가. 젊은 청년들만 나가 싸우고 학도병까지 나가 싸워 죽었다. 동족 간에 싸우는 것은 너무나 큰 비극이다. 왜 이런 전쟁을 해야겠는가, (그때) 살아남는다면 평화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하나님·예수님, 세계평화 위해 말씀 주셔”어린 시절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후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가 있다.전 세계적으로 평화운동가로서의 면모를 톡톡히 드러내고 있는 그는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인도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돌변해 인도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다.간디는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했고, 영국은 맨손으로 독립을 외친 인도인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1930년대에는 대공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영국이 ‘소금법’을 만들어 인도에 소금을 비싼 가격에 팔아치웠다.간디는 하루 60㎞씩 걸어가 직접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어 소금행진을 벌였다. 많은 인도인들은 간디의 운동에 동참했고, 영국은 간디를 감옥에 가뒀다. 간디는 단식을 시작했고, 간디의 건강상태를 다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그러나 간디는 성경을 접하면서 선교사들의 행태가 성경의 메시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고, 평화의 사상을 성경에서 찾게 된다.“(구약성서와는 달리) 신약성서는 매우 다른 인상을 주었고 특히 산상설교는 사뭇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그것을 ‘바가바드 기타(힌두교 경전)’에 견주어 보았다. …중략… 나의 어린 마음은 ‘기타’의 가르침과, 샤말바트의 ‘아시아의 빛’과 산상설교를 하나로 통일해 보려 했다. 내버림이야말로 종교의 최고의 경지란 생각이 내 마음 속에 강하게 울려왔다.”그는 이후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인도의 영적인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그는 사회평화, 종교평화를 외치며 종교인보다 더 종교인다운 생활을 했던 정치인이자 영적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0.2~1948.1.30)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이다. ‘마하트마’는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부른 이름으로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국민들이 간디를 영적인 스승으로 인정하며 이름을 ‘마하트마 간디’로 부르게 됐다.간디는 살생을 하지 않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동양 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 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 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지고 정략(침략전쟁)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엾도다.” - 안중근의 옥중 유묵에서 -조선을 넘어 한‧청‧일의 진정한 공생을 통해 동양의 평화를 이루기 원했던 안중근. 그의 평화사상은 침략자인 일본인들의 마음조차 녹이는 힘을 갖고 있었다.특히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저격을 받은 타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만주 철도 이사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 안중근이지만 오히려 그를 더 높게 평가했다. 그는 후년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권고히 하여 한청일 삼국이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팔천만 이상의 국민이 서로 화합하여 점차개화의 성으로 진보하고 나아가서는 구주와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에 진력하면 시민은 안도하여 비로소 선진의 조칙에 부응할 것으로 생각한다.”안중근은 한‧청‧일을 운명공동체로 인식하고, 서로 상생함으로써 동양에 평화를 가져다주길 간절히 바랐다. 또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란 강한 신념이 천주교를 믿는 그의 신앙에서 나왔다면, 동양의 평화를 위한 방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우리 민족을 침략했기 때문이 아니다. 동양의 평화를 깨트리고 해치는 자이기 때문이다.”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은 중국하얼빈 역에서 세 발의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독립투사이면서 독실한 천주교인이기도 했던 그가 원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평화’였다.그는 망명생활과 의병전쟁 중에서도 매일 아침 하느님을 향해 기도했고, 거사 당일에도 기도 후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초기 안중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무함마드는 AD 610년 불혹의 나이 40세에 ‘알라신’을 만났다.무함마드는 난잡한 생활 풍습과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사회에서 벗어나 히라산의 동굴에서 명상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영체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코란에서는 그가 여러 번에 걸쳐 천사 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가브리엘이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소. 나는 무학자였기에 못 읽는다고 거부했지만, 세 차례나 내게 읽으라고 했소. 난 두려워서 사지가 떨렸소.”무함마드는 글을 배운 적이 없었기에 빛나는 영체가 그에게 글을 읽으라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무함마드는 약자를 보호하고 권리를 보존해주기 위해서 노력했고, 사람들은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다.“무함마드에게 맡기면 안심할 수 있어요. 그는 품행이 정직하고 성실하죠. 또 의로워서 고아와 과부 등 약자를 돌봐줘요. 그를 볼 때마다 감동해요.”사람들은 그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다. 또 분쟁 사안이 생길 때는 그에게 물었다.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신탁인(信託人)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무함마드를 알민이라 불렀다. 아랍말로 알민은 성실한 사람을 뜻한다.그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그러던 중 어린 무함마드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이 생겼다. 12세가 되던 해 숙부인 아부 딸립이 장사를 하러 시리아로 갈 준비를 한 것. 무함마드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채워줄 이 여행에 꼭 함께하기를 원했다.“이 길은 머나먼 길이란다. 어린 너에겐 힘겨울 거야. 따라가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꼭 가고 싶어요. 자신이 있어요. 따라가고 싶어요.”간청하는 무함마드의 요구를 숙부는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이 여행이 얼마나 큰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우리 부족 사람들에게서는 접하기 드문 이름입니다. 왜 무함마드라고 지으셨는지요.”“하하. 그렇지요. 우리 쿠라이시족은 잘 쓰지 않는 이름이지요. 이 이름은 말입니다. 이름 뜻 그대로 이생과 천국에서 칭송을 받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습니다.”조부 압둘 뭇딸립은 아들 압둘라가 일찍 세상을 떠나 과부가 된 며느리 아미나에게서 손주를 얻었다. 서기 570년 4월 22일이다. 뭇딸립은 유복자인 손주를 안고 카바 신전에 가서 ‘무함마드’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탄생한 것.당시 무
[천지일보=이길상 객원기자] 수원시가 건립하고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수원사가 위탁운영 중인 영통종합사회복지관(관장 수안스님)은 지역주민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화합의 장인 ‘영통 벼룩시장’을 운영하고 있다.영통 벼룩시장은 매월 네 번째 토요일에 복지관에서 진행되며, 영통지역에 오랜 나눔 문화로 뿌리를 내려, 청소년뿐만 아니라 지역주민 모두가 참여해 장터를 활성화하고 있다.특히 2013년 한 해에는 월별로 벼룩시장의 주제를 설정해 다양한 체험부스를 운영하고 주민 누구나 직접 참여하도록 하는 등 운영의 수준을 높여, 참여자로 하여금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이러다가 우리 유대교인을 예수에게 다 빼앗기고 말겠군. 공회에 부쳐서 예수를 죽여야 하겠어. 그 길만이 지금 그대로 우리가 살 길이야.”예수의 신랄한 질책이 이어지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회개는커녕 악에 받쳐 급기야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했다. 예수는 왜 당시 제사장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가 있다고 했을까.당시 제사장들의 형편을 보면 이 상황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제사(예배)를 올리는 역할을 한 이들은 하나님이 준 경서인 ‘성경’을 율법으로만 지켰다. 예수를 통해 열린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어둠 속에서 빛은 강한 존재감을 나타낸다. 예수의 존재는 그러했다. 빛이 없는 예루살렘에 빛으로 온 예수.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가리고 싶은 빛이었다.예수 앞에서 그들의 잘못과 더러움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는 그들의 잘못을 방치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하나님의 목자자리에 앉아 유대인들 앞에서 거룩함을 내세워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이들은 잘못을 회개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 앞에 나가는 쪽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했다. 당대